'10일로 지원서 접수의 마감을 하여 이제 정식 등록이 끝난 셈인데 래 13일부터 시작되는 고시로써 마지막 결정을 보게 되는데 그러면 그 지원 상태를 보면 대체로 작년도와 흡사한 비율을 나타내고 있어 대학에 있어서는 그리 심한 경쟁은 못 되는 형편이며 중등교에 있어서는 남자는 4대1 여자는 2대1 정도의 률을 보이고 있는데 이 1차 학교 시험에 불행히도 패배당하는 학생은 2차 시험에서 필사적인 투쟁이 전개된 것으로 보이는데~.'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5월 12일 자)
입학시험은 전쟁터서 사투를 벌이듯 '필사적인 투쟁'으로 신문에 보도 되었다. 당시 대구에는 4개의 대학과 10개의 남녀중학교가 있었다. 1950년 5월에 치러진 중학교 입학시험은 대학보다 경쟁률이 높았다. 왜 그랬을까. 중학교 입학은 대학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이듬해 중고등학교를 분리하기 전까지 중학교는 6년제였다.
따라서 중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대학 진학이 가능했다. 학기는 6월에 시작해 다음 해 8월에 끝났다. 원서 마감 후 도착한 우편 접수를 포함하면 중학교 최종 경쟁률은 처음 발표에 비해 높았다.
◆자신은 못 배웠어도 자식은 공부시켜야
상급학교 진학으로 드러난 교육열은 민생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해방 이태 뒤 닥친 콜레라로 대구경북에서는 4천여 명이 희생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주민들은 수시로 도청으로 몰려가 식량 배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식량난과 미군정의 정책 실패 등은 대구 10월항쟁을 촉발했다. 실업자도 넘쳤다. 1948년 한해만 해도 대구부민 10명 가운데 7명은 일자리가 없어 빈둥거렸다.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이 이어졌다. 불안한 현실의 돌파구로 부모들은 자식들을 공부시키는 데 힘을 쏟아부었다.
자신은 못 배웠어도 자식은 공부시켜야 한다는 부모들의 일념은 곧장 입학 열기로 나타났다. 초등학교 졸업생의 중학교 입학이 급격히 늘어났다. 1946년의 초등학교(초등학교) 졸업생은 20% 정도만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교실 등 학교 여건이 입학생 증가를 따라갈 수 없었다. 초등학교는 콩나물시루 학급이 됐다.
1950년에는 4학년 이하 학년에서 2부제 수업이 본격화됐다. 2부제는 같은 학년을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수업하는 방식이다. 입학생 중에는 나이가 많아 입학이 지연되는 인원도 1천여 명이나 되었다.
초등학교 2부제 수업이 본격화한 그해 대구에는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미취학자가 3만 9천여 명에 달했다. 초등학교 취학 연령인 7~12세가 9천여 명이었고 13~18세는 5천 명에 이르렀다. 이처럼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나이를 먹어 배울 길을 찾지 못한 사람은 공민학교로 발길을 돌렸다. 공민학교는 상당부분 문맹퇴치 교육을 담당했다.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성인은 한글을 배울 수 있도록 성인반을 두었다. '아는 것이 힘'이란 모토가 이때 등장했다.
◆과중한 입학금,학부모 등골휘어
중학교의 치열한 입학 경쟁은 다양한 부작용을 낳았다. 입시 브로커 역시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들은 돈을 매개로 자식의 입학에 목을 맨 학부모를 유혹했다. 학교별로 공정가격이 정해져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이는 그 시절에 이미 학생들의 학교 줄 세우기가 자리 잡았다는 의미였다. 돈으로 입학하는 사례는 일제의 유산으로 비판받았으나 사그라지지 않았다. 해방되던 해에 대구의전 학생들은 부정 입학 타파를 요구했다. 돈이나 권세가 있는 사람들의 자제들이 실력 대신 뒷문으로 입학하는 것을 겨냥한 것이었다.
부정 입학의 소문은 무성해도 사안의 성격상 실제 사례로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1950년에 중학 시험을 목전에 두고 대구가 들썩인 적이 있었다. 돈을 받고 문제를 팔다 적발된 사건 때문이었다. 그해 대구의 중학교 시험지는 대구형무소에서 인쇄를 맡았다. 형무소 간수들이 대구상중과 대구공중의 시험지를 몰래 빼돌려 중앙초등학교 교원에게 수십만 원을 받고 팔아넘겼다. 문제를 건네받은 교원은 이 시험지를 다시 학부모들에게 2만 원씩을 받고 팔았다. 입시 전쟁이 빚은 결과였다.
'진학의 자유란 말뿐 올해 중등학교에 입학하려면 하늘에 별따기 같은 시험지옥이 가로 놓여 있어 좀처럼 패스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모처럼 합격이 된다 쳐도 과중한 입학금을 내지 않으면 등교할 수 없는 제2의 성벽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6월 11일 자)
가난한 집의 자식들은 시험을 통과하더라도 입학금이 비싸 등록 기간 내에 돈을 마련하기가 여간 벅차지 않았다. 물가 폭등으로 월사금, 기부금, 교복, 책값 등을 합치면 10만 원은 족히 들었다. 학부모들의 고통 속에 교육 당국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교육시설 등의 개선을 명분으로 학교 기부금 모집을 용인하는 등 부족한 재정을 학부모들의 주머니로 메우려 했다. 대구중학교에서는 기부금을 내지 않아 학생 50여 명이 정학을 받기도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치러졌다. 시험 준비 시작부터 드러나는 돈의 위력, 점수를 통한 학생 줄 세우기는 70년 전 '필사적인 투쟁'의 입학시험 기사와 맞닿아 있다.
박창원 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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