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 칭찬의 장막

입력 2023-11-09 17:30:00 수정 2023-11-09 18:10:14

유광준 서울취재본부 차장

유광준 서울취재본부 차장
유광준 서울취재본부 차장

'용산' 직원들이 대통령과 소통하는 방법이란다.

1. 부를 때까지 기다린다.

2. 무슨 말이 듣고 싶어서 부르는지 깊이 고민한다.

3. 만나면 칭찬으로 운을 뗀다.

4. 더 큰 칭찬으로 대통령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5. 묻는 말에 대답하면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지적 사항을 살짝 언급한다.

6. 언짢은 기색이 없어도 칭찬으로 분위기를 전환한다.

7. 더 큰 칭찬으로 자리를 마무리한다.

그나마 이 정도면 용기 있는 인사다. 일신의 영달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쓴소리를 어떻게 할지 고민이라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처세의 기술'은 역대 모든 정부에서 아주 요긴하게 활용됐다고 한다. 어디 대통령실만 그러랴!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들어 부쩍 국민과의 소통에 공을 들이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19일 대통령실 회의에서 "나부터 어려운 국민들의 민생 현장을 더 파고들겠다. 용산의 비서실장부터 수석, 비서관 그리고 행정관까지 모든 참모도 책상에만 앉아있지 말고 국민들의 민생 현장에 파고들어 살아있는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들으라"고 지시했다.

그러곤 "초심(初心)으로 돌아가겠다"면서 지난 1일 서울 마포에서 비상경제민생회의를 개최해 택시기사·소상공인·청년·주부 등을 만났다. 앞서 지난달 27일에는 경북 안동 병산서원에서 열린 유림 간담회에 참석했다. 지난 7일 대구 칠성시장에 이어 앞으로도 전국 각지의 전통시장을 방문해 상인들의 고충을 듣겠다고 한다.

야당에선 10·11 서울시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로 민심 이반의 뜨거운 맛을 본 윤 대통령이 내년 4월 치러질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겨냥해 쇼에 나섰다고 삐딱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나라님'이 민초들의 삶을 직접 챙기겠다고 하는데 싫어할 국민은 없다. 그래서 역대 정부에서도 위기를 맞을 때마다 대통령을 '현장'으로 투입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통령의 이 같은 행보는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언론인의 밥줄을 위협하는 행위다.

우리나라가 채택하고 있는 정치제도인 미국식 대통령제는 자유롭고 왕성한 언론의 존재를 전제로 설계됐다. 오죽하면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에 '언론의 자유를 제약하는 그 어떤 법률도 제정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았을까!

건강한 언론은 권력을 감시·비판하는 동시에 민생 현장의 어려움을 정부와 권력자에게 전달하면서 대책 마련을 촉구한다.

물가 관리에 비상등이 들어왔다거나 복지제도의 허점으로 사회적 약자들이 고충을 겪고 있다는 내용의 뉴스가 오늘도 쏟아지고 있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기 위한 구조의 일원으로 언론이 상시 존재한다는 의미다.

심지어 절대왕정이었던 조선시대에도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를 통해 민심과 여론을 임금에게 전달하는 언론 현상이 작동했다.

대통령실에서 유난을 떨지 않아도 민주주의 국가에선 항상 언론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대통령이 민심을 확인할 수 있다. 듣기 역한 기사를 가짜 뉴스로 취급하지만 않는다면.

윤 대통령은 "국민들은 정부 고위직과 국민 사이에 원자탄이 터져도 깨지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콘크리트벽이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거기에 작은 틈이라도 열어줘서 국민들 숨소리와 목소리가 일부라도 전달되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그렇다면 대통령부터 참모들의 달콤한 칭찬에 취하기보다 현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보시라. 대통령이 초심으로 돌아가 민심을 천심으로 듣겠다고 마련한 자리에 우리 편만 앉힌 '삑사리'는 민망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