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경 소설가
10여 년 전 겨울, 친구들과 여행 가자고 꺼냈던 이야기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서, 우리는 갑자기 하얼빈행 비행기를 탔다. 대륙의 작은 공항에 내리자마자 영하 25℃의 찡한 추위보다 먼저 닥쳐온 것은 도시를 온통 뒤덮은 매캐한 석탄 냄새였다. 오리털 의복으로 중무장한 탓에 정작 피부에 닿는 추위는 그리 심하지 않았는데 그 석탄 냄새가 북방의 추위를 더 상징적으로 느끼게 했다.
하얼빈 기차역은 현대적으로 새로 지어졌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던 구역사는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오래된 플랫폼을 볼 수 있었는데,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가 서 있던 자리가 5m 내외, 겨우 승용차 한 대 정도랄까, 거리라기보다 간격이라고 해야 할 만큼 너무나 가까웠던 것에 가장 놀랐다.
안중근은 세 발의 총알로 이토를 쓰러뜨린 후 "코레아 후라"를 외치고 체포되었다. 심문 조사에서 그는 자신이 포수로 살아왔으므로 상박을 겨누면 흉곽을 뚫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어린 시절부터 산과 들을 누비며 짐승을 잡아 왔던 청년 안중근, 사냥 기술자로서의 노련함이 보이는 그 진술이 나는 매우 인상 깊었다.
스스로 배우지 못한 포수라고 칭한 것과는 달리, 이토 히로부미를 쏜 이유를 말하라는 심문관의 요구에 ①조선의 왕후를 살해한 것, ②한국에 불평등한 을사 5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것으로 시작해 무려 15번까지의 이유를 막힘없이 서술한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 이상으로 이 심문에 대한 답변을 중요하게 여겼고, 철저하게 준비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안중근이 시종일관 강조했던 것 하나는 그가 개인이 아닌 대한의군 중대장 자격으로 이토를 쏘았다는 점이었다. 하얼빈역에서 일어난 일이 테러리스트의 저격이나 심지어 애국지사의 의거조차 아니며 나라와 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일부인 것을 그는 분명히 하고자 했다.
그것은 전쟁이 맞았다. 총 한 자루를 품에 넣고 하얼빈으로 가기 전,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는 직책으로 무장 독립 투쟁에 투신했다. 400여 명 규모의 의병대를 이끌고 연해주에서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공작전을 벌이다 1908년 7월 결국 일본군에 의해 궤멸적 타격을 입고 흩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영산 전투였다. 영산 전투의 패퇴 이전까지 부대는 승전을 거듭하고 있었으나 안중근은 생포한 일본군 포로들을 국제법에 의거해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석방된 포로들은 당연하게도 일본군에 부대의 위치를 밀고했다.
그의 고집스러운 원칙주의는 수백 명 동지들의 목숨을 대가로 요구했고, 불신과 비난에 시달려 고립되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후회에 시달렸으나 죽을 때까지 원칙주의자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하얼빈 역에서 외친 '코레아 후라'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러시아어가 아니라 세계 언어인 에스페란토어였다. 그는 자신이 이토를 쏘는 일이 개인의 원한이 아니요 동아시아의 분쟁도 아닌 세계의 정의와 국가 간의 존중에 관한 일임을 명확하게 인식했고, 세상을 향해 일관되게 주장했으며, 그것을 준비하고 표현하기에 철저함을 다했다. 안중근의 서른 해 짧은 생애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원칙주의였다.
유럽과 중동에서 전쟁과 테러의 불길한 연기가 이어지고 있다. 죄 없는 민간인, 심지어 어린이들까지 희생되고 마는 참혹한 현실에 고개를 돌리려 하면, 어느 쪽이 더 수준이 낮고 양심이 적은지 경쟁이라도 하려는 것 같은 졸렬한 국내 정치의 면면에 더욱 할 말을 잃고 만다. 다만 시월의 하늘만은 차갑고 푸르고 맑았다. 가을의 구름 없이 푸른 하늘을 이고 있는 남산 자락에 안중근 기념관이 있다. 1909년 10월 26일 대한의군 중장 안중근은 이미 매서운 추위가 찾아온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흉곽을 쏘았다. 세계 언어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저항 없이 체포되어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15조를 지목하고 항소하지 않은 채 처형된 그의 행적은 세계의 모범이 되고도 남음이 있으나 오늘 우리 모습은 그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안중근 기념관에서, 10월의 남자 안중근의 꼿꼿한 원칙주의를 그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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