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시죠?" 안부부터 배관 수리까지…만능 일꾼 'MZ 통장'

입력 2023-10-12 17:34:02

'마을 보안관' 동구 안심2동 15통장인 장용(36) 씨
2개월 차 새내기 통장 남산4동 17통장 김혜란(34) 씨

대구 남산4동의 김혜란 통장이 주민등록 사실조사를 위해 아파트 세대를 방문하는 모습. 한소연 기자
대구 남산4동의 김혜란 통장이 주민등록 사실조사를 위해 아파트 세대를 방문하는 모습. 한소연 기자

"안녕하십니까. 현재 주민등록 사실조사를 위해 9월 20일까지 담당 통장이 각 세대를 방문해 조사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 부탁드립니다.

대구 중구 남산동 한 아파트에서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남산4동 17통장 김혜란(34) 씨가 직접 멘트를 작성한 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들러 방송을 부탁한 것이다. 김 씨는 "안내문을 붙여도 직접 방문하면 거부감을 보이는 주민들이 계신다. 관리사무소에서 안내 방송을 부탁드리고 전 세대에 송출하면 직접 방문했을 때 조사가 훨씬 수월하다"고 말했다.

2011년 초급장교로 임관한 그는 7년간의 복무를 마친 뒤 결혼과 출산을 거치면서 5년간 경력이 단절됐다. 사회적 활동에 목말라 있던 김 씨가 통장 업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제야 2개월 차 새내기 통장인 그녀지만, 현장에선 베테랑 못지않은 모습이었다.

아파트 현관 앞에 도착한 그는 벨을 누르고 문이 열리자 가지고 있던 차트 목록에서 세대주, 거주 인원 등의 정보를 능숙하게 물어 내려갔다. 그는 "주민등록 사실조사는 무조건 그 세대에 벨을 누르고 대면해서 거주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며 "각 세대를 방문할 때마다 통장의 손길이 미치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고 흐뭇해했다.

물론 모든 주민들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아니다. 김 씨는 "통장임을 나타내는 명패 같은 게 없다 보니 의심을 사기 일쑤"라며 "조사를 하다 보면 '통장인지 아닌지 의심되니 공무원이랑 같이 오라'며 화를 내는 분들도 계셔서 난감할 때가 있다"고 아쉬워했다.

요즘 김 씨의 관심사는 소식지를 놓아둘 가판대를 설치하는 것이다. 그는 "매달 소식지를 나눠드리는데, 마땅히 꽂아둘 곳이 없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경우가 많다"며 "좋은 정보가 많은데 가판대가 있으면 필요하신 분들이 더 많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구 동구 안심2동 매여마을의 장용 통장이 마을 주민들에게 세대 명부 서명을 받고 있다. 김주원 기자
대구 동구 안심2동 매여마을의 장용 통장이 마을 주민들에게 세대 명부 서명을 받고 있다. 김주원 기자

동구 안심2동 15통장인 장용(36) 씨는 마을의 보안관을 자처한다. 그가 담당하는 매여마을은 자연부락이기 때문에 챙겨야 할 일이 많다. 집마다 돌아다니며 안부를 묻는 일도,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를 치우는 일도, 밤새 내린 눈으로 얼어버린 도로를 녹이는 것도 모두 청년 통장인 장 씨의 몫이다.

마을에 있는 오래된 배관을 수리한 장 씨는 오후에 비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 사무실에서 '세대 명부'가 적힌 종이를 들곤 이내 빨간색 차량에 올랐다. 빗줄기가 거세지면 마을을 돌아다니기가 힘들어져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그는 비좁은 골목을 익숙한 듯 이리저리 누볐다.

차를 타도 마을 한 바퀴를 도는 데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만나는 사람마다 안부를 묻고, 근황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을 어르신을 만난 장 씨는 "잘 지내고 계시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불편한 건 없으시죠?" 등의 말을 건네며 종이에 서명을 받았다. 그는 "어르신들이 연세가 많아 요즘엔 석 달에 한 분씩 돌아가시고 있다. 며칠 전에도 조문을 다녀왔다"며 "직접 찾아가 안부를 묻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북 익산에서 특전사로 4년 6개월간 복무 후 2010년 여름 고향으로 돌아온 장 씨는 마을 총무로 일하다가 2년 전 통장이 됐다. 그런 그에게 가장 큰 고민은 마을에 청년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친구들도 서울이나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갔다. 20대가 몇몇 있긴 하지만, 다들 마을을 떠나고 싶어 한다"고 씁쓸함을 드러냈다.

장 씨는 젊은 통장의 맥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 씨는 "자연부락 마을, 아파트 단지 등을 포함해 대다수의 거주 공간에서 노인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청년들의 손길이 더 필요하다고 느낀다"며 "자기가 사는 곳에 애착이 있고 정이 있으면 통장을 한 번쯤 해봐도 괜찮다. 젊은 통장들이 더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