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220> 교훈이 아닌 취향의 존중을 그린 고사인물화

입력 2023-10-06 10:11:44 수정 2023-10-09 07:17:43

미술사 연구자

이명기(1756-1802?),
이명기(1756-1802?), '미원장배석도(米元章拜石圖)', 종이에 담채, 105.7×58.7㎝,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이명기는 정조 때 화원화가다. 화원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 동생, 매제 등이 도화서 화원이었고 장인도 화원이었다. 20대 때부터 '독보일세(獨步一世)'의 초상화가로 이름 나 정조의 어진 제작에 두 차례 선발되어 얼굴을 그리는 주관화사로 뽑혔다. '서직수 초상'을 비롯해 10여 점의 명작 초상화가 남아있는 '당대국수(當代國手)'였다.

정조시대 최고의 초상화가였던 이명기는 다른 그림도 잘 그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호랑나비그림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봄이 되면 날개가 크고 색이 화사한 나비를 잡아 책 속에 끼워 두었다가 종잇장처럼 얇아진 나비를 꺼내 쏙 빼닮게 그렸다. 이명기의 나비그림을 보는 사람마다 나비의 날개 가루가 손에 묻을까 의심했다고 한다. 만져보고 싶을 만큼 실감났던 것이다.

'미원장배석도'는 이명기의 고사인물화다. '송사(宋史)·열전(列傳)·문원(文苑)'에 나오는 중국의 서예가이자 화가이며 감식가이자 수집가인 미불의 일화를 그렸다. 미불이 벼슬하던 무위주에 모양이 기이하고 괴상한 거석(巨石)이 있었다. 이를 본 미불이 아주 좋아하며 "차(此) 족이(足以) 당(當) 오배(吾拜)", "이 돌은 나의 절을 받을만하다"며 의관을 갖추어 절하고 '형'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다.

미불은 모자와 옷차림이 당나라사람 같았고 사용하는 물건도 남달랐던 데다 깨끗한 것을 지나치게 좋아해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그의 성에 '미칠 전(癲)'자를 붙여 미전(米癲)이라고 했다. 세상 물정과 동떨어진 미불의 행위는 비웃음거리였고 이로 인해 벼슬길도 순탄하지 않았다.

'원장배석(元章拜石)'으로 제목을 쓰고 '필(筆) 단원(檀園) 의(意) 화산관(華山館)'이라고 하여 김홍도의 필의를 본받았다고 밝혔다. 원장은 미불의 자(字)이고 화산관은 이명기의 호다. 폭포가 있는 벼랑과 바위의 필치, 여백이 많은 구도, 맑은 담채법 등 도화서의 선배이자 동료인 김홍도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

고사인물화는 옛 인물의 행적을 통해 교훈이나 성찰을 전달하는 그림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어떤 도덕적 규범이나 유교적 이념이 들어있지 않다. '미치광이 미씨'로 불렸던 미불의 낭만적 기행에 대한 상상력을 북돋울 뿐이다.

미불은 진심과 전념의 대상이 도덕도, 학문도, 대의명분도 아닌 자신의 좋아하는 것일 수 있음을 증명한 선각자이며 선구자였다. 남들이 미친 게 아니냐며 손가락질하는 행위를 서슴없이 하며 당당하게 실행했다.

'미원장배석도'는 조선이 바야흐로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사회로 접어들었음을 알려준다.

미술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