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살았던 옛 마을, 내가 태어난 옛집이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고 하면 다들 놀란다. 변화가 빠른 21세기 대한민국, 부동산 광풍이 여러 차례 휩쓴 서울 도심에서 흔히 있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날씨가 좋은 계절에 옛 마을을 산책하며 그리운 얼굴들과 빛바랜 기억들을 소환하면 알 수 없이 내 안에서 인생은 슬프지만 아름다운 것이고 그 덧없는 아름다움에 기대어 한 세상을 살아볼 만한 것이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 숨이 꽤나 가빠질 무렵 인왕산의 숲 끝자락과 길이 맞닿는 부분에 이르면 내가 태어난 옛집이 나타난다. 인가가 사라진 숲자락에 아늑하게 들어앉은 하얀 교회가 있다. 옥인동 서울교회다. 서울교회라는 정식 호칭이 있다는 것은 성인이 되고 나서 뒤늦게 알았다. 아카시아 생울타리로 둘러싸였던 인왕산 숲속의 그 하얀 교회는 우리에게 언제나 하와이교회였다. 어릴 때부터 하와이 교민들이 건립 자금을 보내주어 하와이교회라고 불린다는 교회 탄생 설화를 들으며 자랐다.
이금이 작가의 소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하와이 이민자들, 남편이 될 남자의 사진만 보고 결혼해 이국의 척박한 삶을 개척해 나갔던 '사진 신부'들의 삶을 그린다. 장정들이 하루 열 시간 주 6일 꼬박 일해 버는 한 달 월급이 17달러였다. "젠장, 조선이 우리한테 해 준 게 뭐 있다고. 나라도 나 있고 가족 있은 다음이야. 박용만이고 이승만이고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동포 앞에서 좋은 본은 고사하고 헐뜯고 싸워 대는 꼬락서니 하고는. 그 종자가 그 종자지." 소설 속 청년의 냉소는 당시 이민자 사회의 많은 사람의 마음을 대변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돈을 모아 독립운동을 위한 성금을 냈고, 하와이 교포들의 성금은 임시정부 재정의 절반 넘는 비중을 차지하며 가장 든든한 후원이 되었다.
하와이를 근거지로 외교 중심의 독립을 추구했던 이승만과 무장투쟁을 추구했던 박용만 사이에 어느 쪽 노선이 옳았는지 역사-이념 투쟁을 벌일 생각은 없다. 오늘은 하와이교회에서 느꼈던 단상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며칠 전 친구들과 산책하던 발걸음이 하와이교회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차담을 나누던 마을 주민들은 반가워하며 말을 붙였다. 전임 시장이 교회 건물을 사들여 청소년 문화공간으로 바꾸려 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의 건국 업적과 하와이 교포들의 물심양면 지원을 역사에서 지우려는 속셈이었다고, 이곳은 하와이 교포들의 독립 정신을 전하는 공간으로 보존할 역사적 가치가 있다는 그의 열띤 호소를 들으며 나는 그가 아차하면 전임 시장을 동물로 호칭할까 봐 두려웠다. 벌써 몇 대째 전현직 대통령들과 주요 정치인들이 십이간지에 있는 동물들의 호칭으로 불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진영을 막론하고 멸칭으로 부르는 것은 상대를 존중하고 의논의 파트너로 삼을 생각이 없다는 단호한 선언이다. 한적하고 발길 닿는 이 적은 내 고향 마을에서도 역사-이념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나에게는 무엇보다 씁쓸하게 다가왔다.
당시 고려대를 나온 드문 인텔리였고 월북을 심각하게 고민했다는 한 어른은 당신이 경험한 해방 전후의 혼란기를 이렇게 요약해 들려주었다. "그때는 좌나 우나 한 치 앞을 몰랐어. 각자 양심에 따라서 이념을 택했지. 북한이 저렇게 기형 국가가 될 줄을 누가 미리 알았겠어? 지금 보면 월북이 미친 일이지만, 그때는 남과 북 양쪽 다 일리가 있었어. 지금의 형편으로 그때를 이야기하면 나는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다고." 그렇다. 우리는 역사가 흐른 뒤의 일들로 그 시절을 예단하며 역사에 입바른 소리들을 보태는 중이다. 그때는 미국이, 중국이, 일본이, 어느 나라가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 한 치 앞을 몰랐고 외교전이, 무장투쟁이, 시민 불복종이, 어떤 방법이 독립에 가장 필요할지 한 치 앞을 몰랐다. 각자의 방법으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 애썼고 목숨이 오가는 험한 길들을 걸었다. 대한민국의 풍요로운 오늘을 살면서 목숨을 내건 독립운동의 최일선에 서셨던 분들을 잘했느니 못했느니 평가질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고향 마을의 언덕을 내려오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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