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아는 척, 똑똑한 척, 잘난 척…척척척의 비극

입력 2023-09-18 20:10:37

최경철 논설위원
최경철 논설위원

문재인 정부 2년 차였던 2018년이었다. 추석을 2주 정도 앞둔 그해 9월 11일,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숙 여사와 함께 청와대에서 열린 농수산물 직거래 장터를 찾았다. 행사를 주최한 농협 관계자가 문 대통령에게 과일 가격 등에 대해 설명하려 하자 문 대통령은 "여기 구매자를 상대로"라며 김 여사에게 현황 청취 바통을 넘겼다. 냉해 피해로 사과가 많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전해졌고, 김 여사는 "8개에 4만8천 원이면 한 개 얼마야, 6천 원이네요"라고 했다. 그러고는 "청와대에 온 뒤로 시장을 안 봐서 물가가 비교가 안 돼요"라고 털어놨다.

김 여사의 말은 사과 한 개 6천 원이 비싼 건지, 아니면 평년보다 싼 것인지, 제대로 가늠이 안 된다는 의미였다. 당시 청와대를 출입했던 기자는 이 대화 내용을 올린 보도 자료를 보고 '구름 위의 산책'이란 제목의 칼럼을 썼다. 살림꾼으로 잘 알려진 김 여사가 청와대 입주 불과 1년 4개월여 만에 과일값에 대해 자신 없어 할 정도로 청와대 생활은 바깥과 담을 쌓게 만들었고, 자칫 잘못하면 문 대통령이 구름 위에 떠 있는 통치자가 될 수 있으니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는 제언이 칼럼 주제였다.

그러나 촛불을 앞세워 정권을 잡은 문(文) 정부는 경계심은커녕, 날이 갈수록 대담해졌다. 부동산 대책, 탈원전·소주성(소득주도성장) 정책 등 문 정부 국정 과제 앞에는 사실상 반론이 허용되지 않았다. 야당의 비판은 탄핵된 세력의 헛소리로, 경고를 날리는 기자 역시 기레기로 몰릴 뿐이었다. 취임 2년 차였던 2018년 내내 이어진 실체 없는 남북 평화 무드에 젖어든 문 대통령은 그해 경제성장률이 하락세에 접어들었는데도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그해 11월 20일, 국무회의)라는 황당한 얘기를 꺼내기까지 했다.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진위가 드러나겠지만 감사원이 밝힌 바에 따르면 문 정부 청와대와 국토부는 집값 대책의 실효성을 드러내기 위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최소 94회 이상 한국부동산원 통계 작성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통계 수치를 조작하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소득, 고용 관련 통계에도 문 정부 청와대가 개입한 왜곡·조작이 있었다는 지적을 감사원은 내놨다.

감사원 발표로 문 정부의 정책 오류에 대한 불신이 더욱 커지는 가운데 기자는 문 정부 청와대에서 '무오류'와 '절대성'이라는 종교적 어휘들을 떠올렸던 기억이 난다. 더불어민주당이 2018년 지방선거 압승에 이어 2020년 총선에서마저 대승을 거둔 뒤 그 이듬해가 되자 '문재인 보유국'이라는 말까지 여당에서 나왔다. 선거 경쟁을 통해 선출된 통치자를 지배자와 오인하게 하는 장면까지 목격된 것이다.

촛불이 문 정부에 필요 이상의 정치적 힘을 부여하면서 문 정부는 주권자인 국민들로부터 과도한 규모의 자율성을 획득했고 상식·합리로부터 동떨어진 정책에 함몰돼 갔다. 그 과정에서 불·탈법적 행위를 저질렀다는 의심까지 받는 중이다. 소주성·탈원전 등 현실과 유리된 문 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우리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수습 비용은 너무나 크다.

준비되지 않은 권력이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구중궁궐 청와대에 들어가 아는 척, 잘난 척, 똑똑한 척 하는 순간, 언어유희에 불과한 국정 과제가 양산되면서 대통령 권력의 비극은 잉태됐다. 청와대를 뛰쳐나온 윤석열 정부는 실수 확률을 일단 절반으로 줄였다. 권력의 한계, 때로는 무지를 인정하는 용기까지 가진다면 전임과 확연히 다른 후임의 탄생을 기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