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초보 노인입니다

입력 2023-07-27 11:34:33 수정 2023-07-29 06:37:29

김순옥 지음/민음사 펴냄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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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옥 지음/민음사 펴냄
김순옥 지음/민음사 펴냄

할아버지가 무너진 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부터였다. 장례를 모두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그 날 밤, 부모님과 삼촌 부부의 외출로 기자와 친할아버지만 덩그러니 집에 남았다. 나란히 옷장에 기대 차갑고 조용한 방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 갑자기 할아버지가 울기 시작했다.

"자식들이 자꾸만 날 배신할 것 같다"는 이유였다. 그럴 리 없었다. 더욱이 기자는 평소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빨랐기에 그런 낌새가 있었다면 진작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배신과 거리가 멀었다. 평소 엄하고 엄했던 할아버지가 펑펑 울어버리니 당황스러움에 안절부절못했던 그날의 기억이었다.

그 뒤 할아버지의 어리광은 더 심해졌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본인은 홀로 밥을 차려 먹을 수 없으니 며느리가 매주 밥과 반찬을 해 찾아와야 했고, 외로우니 온 가족들이 매일 안부 전화를 해야 했다. 하지만 정성 들여 해간 반찬에 할아버지는 '맛없다' 했고 이리저리 찾은 노인 야외 활동을 건네줘도 그저 나가기 싫다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난생처음 보는 할아버지 모습에 온 가족은 당황했고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한 요구사항에 조금씩 지쳐갔다. 기자가 본격 노인 탐구에 나선 건 그때부터였다. 점차 커지는 할아버지와 가족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싶어서일까.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를 찾기 위해 노년과 관련된 책을 숱하게 읽었다.

시도는 꽤 괜찮았다. 당시 공부한 내용에 따르면 노인이 되면 미각이 둔해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어 먹는 즐거움이 줄어들고, 여성보다 남성에게 목소리 노화가 더 잘 일어나 말수가 적어져 타인과 대화가 줄어든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도 즐겁게 대화할 수가 없어서 타인과 만남을 꺼리게 된다. 차츰차츰 할아버지의 행동에 대한 이해 폭이 넓어지면서 당시 가족들은 다시 힘을 합치기로 했다.

무려 6년 전 일이지만 기자는 꽤 일찍 '노인이 되는 것'을 배웠다. 한국에선 만 65세가 되면 노인으로 분류된다. 기자의 부모님도 몇 년 후면 노인이다. 부모님이 노인이라긴 젊기만 한데 늙음을 맞닥뜨려야 한다니…. 당장 자식인 기자부터 기분이 이상해진다. 아마 젊은 채로 늙음을 맞아야 할 당사자들은 더 당황스러울 것이다.

"처음엔 너무 이상했어요. 내가 노인이라니"

여기에 초보 노인이 한 명 더 있다. <제10회 브런치 북> 대상 수상작인 에세이 '초보 노인입니다'의 김순옥 작가다. 이 책은 이제 막 노년기에 진입한 60대 저자의 솔직한 수기이자 노년기에 대한 섬세한 관찰기다. 가능한 먼 미래로 미뤄 두고 싶은 노년의 삶을 조금 일찍 마주쳐 버린 이의 솔직한 토로는 천만 실버 시대에 필요하지만 세상에 잘 나오지 않은 이야기다. 그래서 이 책은 새로운 매력을 보여 준다.

에세이의 배경은 노인들을 위한 맞춤형 주거지, 실버아파트. 입주민의 평균 나이가 80대인 실버아파트는 은퇴 후 살아가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저자는 그저 가격이 싸고 신축 아파트라는 이유로 이곳에 입주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스스로 아직 노인이 될 준비가 돼 있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실버아파트에서 초보 실버인 자신의 실체를 만나면서다. 실버아파트에서 노인들과 함께 산책하고 대화하며 저자는 노인이 된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본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노년기에 대한 선행 학습인 셈이다.

책의 막바지에서는 저자가 노년기에 들어선 일상을 솔직하게 유쾌하게 그려낸다. 지하철에서, 사진관에서, 평범한 하루 속에서 저자는 노인이 된 자신과 수시로 마주친다. 그리고 고백한다. 죽음 전에 지나야 할 실버기는 어떤 생애 주기보다 길며, 그 긴 시간을 견뎌 내는 일에 위로와 공감이 필요하다고. 초보 실버기에 들어선 이들이 끝까지 담담하며 당당하기를 바란다고.

우리는 그렇게 늙어가는 것이다. 264쪽, 1만6천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