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세계사] 용병, 고대 함무라비 왕부터 카르타고 한니발까지

입력 2023-07-21 13:30:00 수정 2023-07-22 07:54:02

바그너 용병 앞세운 푸틴…언제쯤 용병 역사 사라지려나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드네프르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수변 도시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드네프르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수변 도시다.

영화 [해바라기]. 89살의 소피아 로렌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1970년 열연한 영화다. 냉전시대 철의 장막 소련에서 촬영된 영화라 상영 금지되다 1982년에서야 국내 개봉됐다. 거기서 다시 몇 년 흘러 학창시절 재개봉관에서 눈시울 적시던 기억이 새롭다. 영화음악의 거장 헨리 맨시니의 감미로운 사랑의 테마 선율에 휘감겨 끝없이 펼쳐지던 샛노란 해바라기밭.

촬영지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동남쪽에 자리한 폴타바 지역이다. 해바라기밭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 침략에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던 전장이다. 바로 그 해바라기밭으로 80여년 흘러 다시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비극의 전쟁이 벌써 1년을 훌쩍 넘겼다.

멀쩡한 우크라이나 도시들이 파괴되고, 많은 인명피해가 났다. 전쟁 전 찾았던 아름다운 드네프르 강변의 수도 키이우도 제모습을 잃었다. 침략자 러시아인의 피해도 만만찮다. 영화 속 소피아 로렌의 비련은 지금도 바로 그 해바라기밭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저주받을 우크라이나 전쟁의 중심에 푸틴과 함께 프리고진의 바그너 용병그룹이 어른거린다.

나치 히틀러가 존경했던 독일의 19세기 오페라 작가,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니벨룽겐의 반지]로 이름 높은 리하르트 바그너가 전쟁범죄의 한가운데 우뚝 설 줄이야... 인류는 언제부터 용병을 활용했을까?

함무라비 법전. 용병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B.C18세기. 파리 루브르 박물관
함무라비 법전. 용병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B.C18세기. 파리 루브르 박물관

◆함무라비 법전, 메소포타미아 용병 기록

인류 역사문화유산의 보고 파리 루브르로 가보자. 리슐리외관 메소포타미아 전시실로 가면 검은색 섬록암 비석이 비범한 자태를 뽐낸다. 함무라비 법전. 이란의 역사 고도, 수사에서 1901년 프랑스 고고학팀이 발굴해 가져왔다. 높이 225cm 비석법전은 고바빌로니아 왕국 함무라비(재위 B.C1790–B.C1750년) 왕 치세기에 제작됐다.

서문과 282개 법조항을 수메르 쐐기문자로 적었다. 언어는 수메르 민족을 몰아내고 등장한 셈족 아카드인의 아카드어다. 일부 마모된 부분을 빼고 246개 조항이 판독됐다. 시카고 대학 하퍼 박사가 1904년 펴낸 『바빌론왕 함무라비 법전(1904년)』을 펼쳐 보면. 26조에 용병 관련 언급이 나온다.

원문을 읽어보자. "만약 장교나 군인이 전쟁을 위한 왕의 명을 따르라는 명령을 받고도 가지 않거나 용병을 쓰고도 보상금을 주지 않을 경우 사형에 처한다". 그러니까 전쟁터에 나가기 싫으면 용병을 쓰되 반드시 대가를 지불하라는 의무조항을 담는다.

이집트의 메소포타미아 용병.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다. B.C 14세기. 베를린 노이에스 박물관
이집트의 메소포타미아 용병.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다. B.C 14세기. 베를린 노이에스 박물관

◆이집트에 온 메소포타미아와 흑인 용병

무대를 독일 수도 베를린 노이에스(신) 박물관으로 옮겨보자. 고대 이집트 신왕국 18왕조 때 B.C14세기 그림에 메소포타미아 스타일의 짧은 치마를 입은 건장한 남성이 허리춤에 칼을 차고 앉았다. 긴 수염은 메소포타미아의 상징이다. 오른쪽에 이집트인 아내, 가운데 이집트 하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맥주를 마시는 이 인물은 메소포타미아 용병이다.

필자가 눈으로 확인한 가장 오래된 이집트 용병관련 유물은 이탈리아 북부 공업도시 토리노 이집트 박물관에 있다. 이탈리아 이집트 학자 스키파렐리가 이집트 역사 제1중간기(B.C22-B.C20세기, 7왕조-11왕조) 무덤에서 발굴한 조각이다. 무덤 주인공 트제네누가 아내와 함께 왼쪽에 서 있다. 누비아(수단) 출신 흑인이다.

누비아(수단) 출신 용병 트제네누와 부인. 손에 큰 활과 화살통을 든 궁수다. 트제네누 앞의 하인 1명을 제외하고 그 뒤 4명 역시 궁수 용병으로 트제네누의 흑인 형제들이다. B.C22-B.C20세기. 토리노 이집트 박물관
누비아(수단) 출신 용병 트제네누와 부인. 손에 큰 활과 화살통을 든 궁수다. 트제네누 앞의 하인 1명을 제외하고 그 뒤 4명 역시 궁수 용병으로 트제네누의 흑인 형제들이다. B.C22-B.C20세기. 토리노 이집트 박물관

허리춤에 찬 띠가 이를 말해준다. 왼손에는 긴 활, 오른손에는 화살통을 들었다. 이집트에서 고용한 흑인 궁수다. 그 앞에 하인이 1명, 뒤로 4명의 흑인 궁수가 더 보인다. 4명 모두 화살통과 활을 들었다. 트제네누의 형제들로 용병이다. 같은 시기 즉 제1중간기 군대 책임자이자 궁정 재무관 이티의 룩소르 남부 게벨레인 무덤에서 1911년 출토한 프레스코에는 4명의 궁수가 긴 활을 들고 등장한다.

피부색이 다른 이집트 궁수들. 용병임을 말해준다. B.C22-B.C20세기. 토리노 이집트 박물관
피부색이 다른 이집트 궁수들. 용병임을 말해준다. B.C22-B.C20세기. 토리노 이집트 박물관

2명씩 피부색이 다르다. 이민족 용병임을 말해준다. 당시 요르단, 시리아, 아나톨리아 출신도 용병으로 왔다. 이렇게 근동 아시아인 용병을 마리야누(Maryannu)라고 불렀다. '젊은 전사'라는 뜻이다. 전차를 타고 활을 쏘는 용병전사다.

◆이집트에 온 그리스 용병 집단 거주지

B.C 664년 이집트 프삼티크 1세는 그리스 용병을 대거 고용해 권력기반을 구축했다. 아들 네코 2세(재위 B.C 610년-B.C 595년)를 거쳐 그 아들 프삼티크 2세(재위 B.C 595년-B.C 589년)때 온 그리스 용병들은 아부심벨의 람세스 2세 동상에 그리스어로 글을 남기기도 했다. 프삼티크 2세의 아들 아프리에스(재위 B.C 589년-B.C 570년) 파라오 때 그리스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다시 그리스 용병으로 막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스핑크스 모습의 아프리에스 파라오. 고대 이집트 말기 파라오로 그리스출신 용병을 대거 고용했다. B.C6세기. 루브르 박물관
스핑크스 모습의 아프리에스 파라오. 고대 이집트 말기 파라오로 그리스출신 용병을 대거 고용했다. B.C6세기. 루브르 박물관

이 틈에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 파라오가 된 아마시스(재위 B.C 570년-B.C 526년)는 비옥한 나일 삼각주에 외국인 전용 도시 나우크라티스를 건설하고 그리스 용병들에게 거주를 허용했다. 그리스인들은 B.C776년부터 올림픽을 시작했고, 덕분에 평소 체력 단련에 열심이었다. 강인한 체력은 전투력과 직결돼 부국 이집트의 용병으로 제격이었다.

B.C570년 이후 이집트는 나우크라티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용병과 그리스 거주민들이 사실상 권력을 휘두르는 나라가 됐다. 이때부터 그리스 본토로 이집트 문화가 대거 유입돼 그리스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이집트-페르시아 최후 혈전, 양측 주역은 그리스 용병

그리스인에게 대거 특혜를 준 아마시스에 이어 프삼티크 3세(재위 B.C 526년-B.C 525년) 시기 페르시아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정복 지배했다. 이후 이집트는 페르시아 지배와 토착 이집트 왕조의 부활을 반복하는데, 여기에 결정적인 변수는 그리스 출신 용병이었다. 2만여명에 달하는 그리스 용병들이 페르시아와 이집트 가운데 돈을 더 주는 쪽으로 오가며 승부를 갈랐다.

그리스 스파르타 레오니다스 왕 동상. 그리스 병사들의 일반적인 차림새다.
그리스 스파르타 레오니다스 왕 동상. 그리스 병사들의 일반적인 차림새다.

이런 전투 양상의 최후 혈전이 B.C 343년 나일강 하구 이집트 요새 펠루시움에서 펼쳐졌다. 양쪽 선봉은 그리스 용병이었다. 페르시아에 고용된 그리스 용병들이 이집트 측 그리스 용병을 압도해 이집트는 페르시아 지배로 들어갔다. 하지만, 10년 뒤 B.C333년 알렉산더가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페르시아를 물리치면서 이집트는 그리스 용병이 아닌 마케도니아 출신 그리스 왕조 지배 시대로 들어섰다.

◆로마-카르타고 전쟁, 한니발의 용병 부대

북아프리카의 진주 튀니지 수도 튀니스로 가보자. 아름다운 바닷가 해안 도시 튀니스는 이슬람 시대 건설된 신시가지다. 바닷가에 바로 붙은 구시가지는 인류사에 빛나는 궤적을 남긴 카르타고다. 명장 한니발이 B.C202년 카르타고 근처 자마에서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와 양국의 운명을 걸고 맞붙었다.

한니발 병력은 보병 4만 5천명에 기병 6천명, 코끼리 80마리. 스키피오는 보병 3만 4천명에 기병 6천명. 이때 한니발 군단은 맨 앞에 전투용 코끼리 80마리를 세우고, 3줄로 군대를 편성했다. 첫 줄은 갈리아와 리구리아에서 사온 용병을 세웠다. 둘째 줄은 북아프리카 용병과 카르타고인, 셋째 줄은 자신과 동거동락한 병사들, 양 옆으로 기병대를 세웠다.

카르타고 로마유적. 카르타고는 B.C146년 3차 포에니 전쟁 뒤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됐다. 이후 B.C1세기 로마도시로 재건됐다.
카르타고 로마유적. 카르타고는 B.C146년 3차 포에니 전쟁 뒤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됐다. 이후 B.C1세기 로마도시로 재건됐다.

로마의 스키피오는 맨 앞줄에 보잘 것 없는 무기의 '하스타티(가난한 병사)', 다음 '프린키페스(일반 시민)'의 중무장 보병, 셋째 줄에 부유층과 노병, 좌우에 로마 기병대와 제휴 국가인 토착 마시니사 왕 기병대를 배치했다. 로마 시민 병사와 카르타고 용병의 대결에서 승부를 가른 결정적인 변수는 로마측에 선 사실상의 용병 마시니사 기병대였다.

이 2차 포에니 전쟁 패배로 사실상 카르타고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측 용병 바그너 그룹 군대가 중심역할을 수행하듯, 고대 인류사 주요 전투의 운명을 용병이 갈랐다는 점에 입맛이 씁쓸해진다. 언제 쯤 용병의 역사가 사위려나...

역사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