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경 교수의 수도원 탐방기] 남부 독일, 에탈 수도원(Ettal Abbey)

입력 2023-07-14 13:30:00 수정 2023-07-14 17:24:10

세상 한복판, 일상 시공간 속에서 절제하는 수도승적 '삶'
'약속의 계곡' 뜻 에탈 수도원 건립…황제에게 '진정한 자유' 회복 장소

에탈 수도원은 남부독일 알프스 산맥 고산준령에 위치해 있다.바이에른의 황제 루드비히 4세가 1330년 4월 28일에 세웠다.
에탈 수도원은 남부독일 알프스 산맥 고산준령에 위치해 있다.바이에른의 황제 루드비히 4세가 1330년 4월 28일에 세웠다.

이번 여정의 목적은 알프스 산맥 고산준령에 산재한 수도원을 찾는데 있다. 순례는 인생과 같아서 시작과 끝이 분명한 것 같다. 우리는 시작과 끝을 뮌헨으로 잡았다. 뮌헨은 한국 베네딕트 수도원과 깊은 인연이 있다. 1909년에 5명의 뮌헨 근처 상트 오틸리엔 수도승들이 한국에 들어옴으로 원산인근 덕원 수도원에 이어 왜관 베네딕트 수도원이 시작되지 않았는가. 중세의 삶이 깃든 수도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돌아보게 하고, 자신의 근원을 찾게 할 것이다.

◆ 바이에른 황제 루드비히 4세가 건립

에탈 수도원(Ettal Abbey)은 이탈리아에서 알프스를 넘어 아우크스베르크에 이르는 옛 로마 도로에 위치해 있었다. 오스트리아 국경과도 가까운 마을로, 작지만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바이에른 왕 루드비히 2세가 자신이 직접 살 궁전 린데호프를 이곳에 지을만큼 산과 호수가 아름답다.

나는 단 몇 번이라도 좋으니 에탈 수도원의 저녁의 평온함과 아침의 고요를 경험하고 싶었다. 염원이 기도가 되었는지 해 지기 전, 에탈에 도착했다. 수도원의 고요를 가장 깊이 느낄 수 있는 수도원 서쪽 작은 언덕 위 숙소에 짐을 풀었다.

육중한 교회당 문을 열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니 미사가 집전되고 있다.
육중한 교회당 문을 열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니 미사가 집전되고 있다.

이른 아침 에탈 수도원을 찾았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을 압도하고도 남을 거대한 수도원이 눈앞에 서 있었다. 알프스의 작은 골짜기 동서 축을 중심으로 웅장한 수도원이 앉아 있었다. 수도원 교회는 가로 세로 100m나 되는 웅장한 바로크양식의 건축물이었다. 에탈 수도원은 장방형 토지 위에 거대한 수도원 교회, 수도승들의 생활공간, 베네딕트 수도원의 모토인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에 기초한 작업 공간, 손님을 맞이하는 환대의 공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에탈 수도원은 바이에른의 황제 루드비히 4세가 1330년 4월 28일에 세웠다. 최초의 교회는 1370년 고딕 양식으로 완공되었다. 황제는 이곳에 수도원을 세워 봉헌한 후, 수도원 이름을 '에탈'이라고 칭했다. 에탈은 '약속의 계곡'이라는 뜻이다. 에탈 수도원은 바이에른 주는 물론이고,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등에까지 종교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에탈 수도원 교회는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세 개의 첨탑이 인상적이었다.세 첨탑을 바라보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떠올려 본다.
에탈 수도원 교회는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세 개의 첨탑이 인상적이었다.세 첨탑을 바라보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떠올려 본다.

◆땅은 그만 쳐다보고, 하늘을 쳐다보며 살라

에탈 수도원의 중심은 동쪽에 위치한 수도원 교회이다. 수도원 교회는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세 개의 첨탑이 인상적이었다. 교회의 돔 위에 우뚝 솟은 중앙 첨탑은 높이가 무려 71m나 된다. 그리고 양 옆에 좌우 첨탑이 두 개 서 있다. 좌우 두 첨탑의 높이는 비슷하지만 다른 시기에 다른 양식으로 지어져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에탈 수도원의 세 첨탑은 닮은 듯 다른 모습이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세 첨탑을 바라보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떠올려 볼 것이다. 세 첨탑이 닮은 듯 다른 모습에서 하나이면서 구분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나는 목이 아프도록 첨탑을 쳐봤다. 아니 에탈 수도원의 세 첨탑이 나를 끊임없이 하늘을 바라보게 했다. 첨탑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이제 땅은 그만 쳐다보고, 하늘을 쳐다보며 살라고 말이다. 우리는 땅을 딛고 서 있지만 우리 마음은 하늘을 향해 있어야 한다.

에탈 수도원 천장의 프레스코화는 천국이 이 땅에 침입하도록 설계된 듯하다.
에탈 수도원 천장의 프레스코화는 천국이 이 땅에 침입하도록 설계된 듯하다.

육중한 교회당 문을 열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막 예배가 시작된 것 같았다. 제단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하늘에서 내려오는 밝은 빛이 시선을 막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빛이 내려오는 예배당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그곳에는 천장은 없고 하늘만 있었다. 예배당의 돔에 그려진 천국이 천장이 없는 효과를 구현하고 있었다. 에탈 수도원 천장의 프레스코화는 천국이 이 땅에 침입하도록 설계된 것이 분명했다.

에탈 수도원의 프레스코화에서 비로소 나는 바로크 예술의 진면목을 본 것이다.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다시 예배당 천장을 바라봤다. 하나, 둘 예배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자리를 떴다. 예배당을 나와 오른쪽 복도를 향해 걷자 교회당 벽에 붙은 동판이 눈에 확 들어왔다.

◆나치 정권에 저항한 두 종교인

자세히 보내 나치에 저항한 두 사람의 이름에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한 사람은 로마 가톨릭 신부 루퍼트 마이어(Rupert Mayer), 다른 한 사람은 개신교 목사이자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였다. 마이어는 수차례 수용소에서 감금되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에탈 수도원에서 연금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교회당 벽에 붙은 동판에는 나치에 저항한 로마 가톨릭 신부 루퍼트 마이어와 개신교 목사이자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의 이름이 적혀 있다.
교회당 벽에 붙은 동판에는 나치에 저항한 로마 가톨릭 신부 루퍼트 마이어와 개신교 목사이자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의 이름이 적혀 있다.

두 사람을 기억하는 동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는 나치 정권에 대항해서 저항했고, 그리고 에탈에 연금됐다". 특히 본회퍼의 이름 아래는 한 편의 시가 적혀 있었다. "은혜로운 힘에 의해 놀랍게 보호하시니, 무슨 일이 일어나든 평안하게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아침과 저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참으로 모든 날이 새롭습니다." 나는 이 문장에서 순교(처형)를 앞둔 본회퍼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에탈 수도원 교회 벽에 새겨진 나치 정권에 저항한 두 종교인. 루퍼트 마이어는 1945년 미군에 의해 석방되었다. 그가 죽은 지 42년 지난 1987년 복자로 시복되었다. 본회퍼는 나치에 저항한 혐의로, 히틀러 암살 시도 혐의로 1945년 강제 수용소에 이송, 야간에 즉결 심판을 받고, 1945년 4월 9일 새벽 39세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개신교 목사이자 신학자인 본회퍼는 이곳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경험했던 것인가. 나는 에탈 수도원 예배당을 나오면서 이 수도원과 본회퍼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나는 에탈 수도원이 시대의 진정한 위로와 화해의 장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에탈 수도원의 설립자 바이에른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는 넓은 영토를 다스려야하는 부담감 때문에 늘 힘들었다. 그때 어느 수도승이 찾아와 가르미슈 파텐키르헨에 수도원을 건설하면 황제의 고난과 역경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수도원을 건설하자 황제는 세상사로부터 해방되었다. 에탈 수도원은 탄생 자체가 '진정한 자유'의 회복이었다.

에탈 수도원내 서점에는 본회퍼의 책들이 꽂혀있다.
에탈 수도원내 서점에는 본회퍼의 책들이 꽂혀있다.

◆자기를 비워내고 절제하는 삶

본회퍼는 1940년 11월부터 1941년 2월까지 4개월 동안 에탈 수도원에서 지냈다. 에탈 수도원은 개신교 신학자 본회퍼에게 놀라운 정도로 우호적이었다. 그는 그곳의 수도승처럼 수도원의 시설을 마음대로 사용했다. 본회퍼는 에탈 수도원에 감동했다. 1940년 에탈 수도원의 수도원장과 몇몇 수도승들이 성탄절에 본회퍼의 책 『나를 따르라』를 낭독하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자신의 책을 읽는 광경에 그는 큰 힘을 얻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 나치에 저항하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간 본회퍼. 필자는 에탈 수도원 교회당에서, 서점에서, 수도원 숙소에서 지금 그와 만나고 있다. 본회퍼가 나에게 우리 시대에 인류가 직면한 환경문제, 전쟁과 난민, 도구적 이성으로 파편화된 세계에서 너는 어떤 신앙과 양심으로 서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본회퍼는 루터를 좋아했고, 그의 저서 곳곳에서 루터의 문장을 그대로 가져올 정도로 루터를 따랐던 사람이다. 그랬던 그가 자신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시기, 핵심적인 저서 『윤리학』을 가톨릭 수도원인 에탈 수도원에서 집필했다. 그는 이곳에서 베네딕트 수도회의 지혜를 맛봤고, 개신교의 토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자연신학'도 재발견했다.

본회퍼는 에탈 수도원에 있는 동안 성경읽기, 기도, 침묵 내면의 리듬이 흐르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그의 신앙공동체 핑켄발데(Finkenwalde)에서는 시편 읽기, 기도, 찬송, 침묵이 하루의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누군가는 본회퍼를 새로운 수도원 운동가라고 비판하며 그가 교회의 회복을 새로운 수도원 운동에서 찾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한 공간에서 생활하며 내면으로만 깊이 침잠하는 수도승적 삶을 말하지 않았다. 본회퍼는 세상 한 복판에서 수도승적 삶이 실천되어야함을 역설했다. 그에게 수도생활이란 세상을 섬기기 위해 수도승처럼 철저히 자기를 비워내고 절제하는 삶이었다. 그렇다. 수도승적 삶이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삶이 아니라 일상의 시간과 공간이 곧 수도승적 삶이리라.

글·사진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