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미의 마음과 마음] 뇌기능과 추억

입력 2023-07-06 12:43:28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칼국수 아줌마의 수육 한 접시> 라는 책을 읽었다. 30여년간 근무하던 병원에서 정년퇴임하면서 쓴 회고록이다. 의사이자 교수였던 그의 책 서문에 나오는 문장을 옮겨본다. <우리 민족의 멋을 가장 잘 표현한 것 중 하나가 헤지고 흩어진 천 조각들을 다시 모아 만든 전통 조각보라 했다. 쓸모없는 작은 조각을 모아 새 쓰임새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신 선배 박윤규 교수님의 조각보 그림을 표지로 모셔서 나의 부족함과 책의 엉성함을 가려보려 노력했다>.

서문과 표지 그림에 매료되어 책을 집어 들었다가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오글거리는 표현은 없어도 넉넉한 사랑과 감사함을 전했고, 항상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유머와 재치로 표현하여 누구도 불편하지 않게 했다. 의사 중에 이렇게 유쾌한 달변가가 있었단 말인가. 수필가 피천득은 "과거를 역력하게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장수하는 사람이며, 그 생활이 아름답고 화려하다면 그가 비록 가난하더라도 유복한 사람이다." 라고 했다.

이재태 교수님은 회상할 추억이 밤하늘 별처럼 많으니 얼마나 잘 살아오신 분인가.최근에 강한 인상을 남긴 환자 분이 있었다. 여든을 훌쩍 넘은 할아버지로 훤칠한 키에 미남이었다. 보호자들이 병원에 모셔온 이유는 한달 전부터 할아버지가 말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자녀들이 말을 걸어도 눈도 뜨지 않고 대답을 하지 않아서 우울증인가 걱정이 된다고 정신과로 모셔왔다.

은발의 노신사는 자녀 셋을 전문직으로 키워냈고, 자식들에게 경제적으로 의탁하지 않으니 잘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러나 불행은 물감이 번지듯 서서히 찾아왔다. 기억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자녀들이 모시기에 힘들 정도로 악화되었다. 딸이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 상태를 설명해도 무심한 아버지는 눈을 꾸욱 감고 미동조차 없었다. 최근에는 귀까지 어두워져서 대화가 더 힘들어졌고, 한 달전부터는 아예 대화가 단절되었다.

할아버지는 자녀들의 근심어린 이야기에 전혀 주눅들지 않았고, 치매 노인이라는 말에 모욕감을 보이지도 않았고, 동정심에 기대지 않는 당당한 모습이었다. 진찰을 위한 몇 가지 질문을 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난감했다. 그래서 <할아버지~ > 큰소리로 불렀더니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셨다. 진료 탁자에 놓여있는 공에 할아버지의 시선이 머무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공을 집어서 예고 없이 할아버지에게 슬쩍 던졌다. 그랬더니 민첩한 동작으로 공을 받아주시는 게 아닌가. <할아버지, 그 공을 제게 다시 던져주세요.> 했더니, 내가 받기 좋은 구질로 던져주셨다. 그리고 밀납인형같던 분이 말문을 열었다. <난 정구 선수였어. 그때는 내가 항상 1등 했어.> 눈빛이 반짝이고 생기가 돌았다. 보호자도 의사인 나도 어리둥절했다. 할아버지께서 말문을 터주신 덕에 보호자들은 내게 고맙다고 90도로 인사를 했다.

진료를 마칠 때는 갑자기 쩌렁거리는 목소리로 '충성' 하면서 거수경례를 하시는 게 아닌가. 나도 반사적으로 경례를 따라했더니 엄지척을 해주셨다. 엄청난 리액션을 해주신 할아버지가 너무 고마웠다. 노신사는 집에 가서 또 말문을 닫을테고, 식사하는 방법도 점차 잊어버리겠지만, 장맛비에 잠시 나온 해처럼, 마알간 그 분의 웃음은 가족과 의사에게 큰 위로를 주었다.

노신사는 군대 시절, 씩씩한 군인이었을테지. 멋진 군복을 입은 헌병이었을까. 우렁찬 목소리로 얼마나 기상을 떨쳤을까. 젊은 날, 정구 선수였다니, 하얀 운동복에 부드러운 머리칼을 휘날리며 얼마나 멋진 스매싱을 날렸을까. 관중석 박수갈채는 얼마나 뿌듯한 자아감으로 이어졌을까. 좀 더 기억력이 살아있었다면 이재태 교수님처럼 멋진 추억들을 들려주지 않았을까. 안타까움에 잠시 상념에 잠겼다.

치매는 머릿속의 지우개가 최근 기억부터 하나씩 지워가는 병이다. 기억력 저하가 수면위로 나타나기까지 수년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된다. 그래서 40대부터 치매를 예방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과학의 발달로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건강은 더 위협받는 아이러니 속에 살고 있다. 차를 타면서 걷기가 줄어들고 하체는 약해지고, 스마트폰에 의지하여 간단한 전화번호 하나 기억할 필요가 없으니 뇌 기능도 퇴화되고 있다.

도시는 사람의 오감을 과도하게 자극하는 환경이다. 층간 소음에 시달리고 누군가 몰카로 나의 사생활을 훔쳐보지 않을까. 해킹하지 않을까. 보이스 피싱은 나의 통장을 노리고 있지 않을까. 자신을 지키려는 노력은 경계심으로 이어지고 뇌의 수신 안테나는 풀가동되어 극심한 피로감에 시달리고 있다. 매사가 힘겹게 느껴지거나 귀찮아지고 쉽게 짜증이 나면 뇌가 지쳐있다는 신호다. 번아웃 상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치매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추억을 회상하며 노블리스 하게 나이 들어가는 방법은 없을까. 기본적으로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등의 원인 질환을 잘 관리해야 한다. 규칙적인 운동과 사회활동으로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걷기, 자전거 타기 등의 유산소운동과 근력운동을 일주일에 3회 이상, 1회 30분 이상 숨이 약간 차는 정도로 하는 것이 좋다.

도시의 이방인으로 느껴질 때 산에 올라 여백의 시간을 가져보자. 바람 소리, 물소리, 새소리를 자신에게 들려주면, 오감이 쾌적해지고 지친 뇌가 회복될 수 있다. 처마에 떨어지는 빗소리, 밤하늘의 별 보기, 낯선 바닷가에서 우연한 낙조와의 조우. 이런 자연의 경험은 우리를 회복시킨다.

평생을 의료에 헌신하신 이재태 교수님, 나의 공 던지기 환자였던 할아버지. 두 분의 이름 속에 얼마나 많은 세월과 노력이 스며있는지. 장석주의 시 <대추>를 두 분과 그리고 열심히 살아오신 분들게 읽어드리고 싶다. 시한편의 감동도 우리의 뇌를 건강하게 해주는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대추 한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이 몇 개, 저 안에 천둥이 몇 개, 저 안에 벼락이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