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현장] '킬러문항'이라는 유령

입력 2023-07-04 15:06:46 수정 2023-07-04 18:31:56

사회부 윤정훈 기자

사회부 윤정훈 기자
사회부 윤정훈 기자

나는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왔다. 여타 학교들처럼, 공부 좀 하는 애들을 모아 놓고 밤늦게까지 자습시키는 '심화반'이 있었다.

이 심화반엔 잔인한 규칙이 존재했다. 문·이과로 구역을 나누고, 각 과 1등부터 꼴찌까지 책상을 지정했다. 꼴찌에 가까울수록 입구 쪽, 1등에 가까울수록 안쪽 책상에 앉았다.

좀 더 안쪽에 앉으려면 다음 시험에서 내 왼쪽 애보다 한 문제라도 더 맞혀야 했다. 시험 성적에 따라 책상이 바뀌고, 양 옆 친구가 달라졌다. 커트라인에 들지 못한 아이는 모두가 다 보는 앞에서 호명된 후 짐을 챙겨 교실을 나갔다. 한창 예민한 나이의 청소년이 감당하기엔 벅찬 수모였다.

그럼에도 심화반 시스템 자체에 반기를 드는 아이는 없었다. 이 심화반이 최종 목표인 대입 구조의 축소판이란 걸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전에선 책상이 대학으로, 중간·기말고사가 수능으로 바뀔 뿐, 어차피 겪을 현실이란 거다.

심화반 아이들도 아는 걸 정부는 왜 모른 척하고 벌집만 쑤시고 있을까.

지난달 교육부는 킬러 문항 수능 출제 배제를 골자로 하는 '사교육비 경감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최근 3년간 수능과 올해 치러진 6월 모의평가(모평)에서 출제된 문항 중 킬러 문항 22개를 예시로 공개했다.

수학 영역에선 '고차원적인 접근 방식을 요구한다' '해결 과정이 복잡하다' '실수를 유발할 수 있다' 등의 이유로 9개 문항이 킬러 문항으로 뽑혔다. 국어(7개)나 영어(6개) 영역은 과도한 추론 필요, 추상적 개념 사용 등이 이유였다.

그러나 킬러 문항의 기준은 불명확하고 주관적이다. 교육부와 EBS 해설 강의의 평가 또한 엇갈린다.

교육부는 2022학년도 수능 수학(미적분) 29번을 킬러 문항으로 선정했다. 공교육에서 다루는 수준보다 다소 복잡한 함수를 다루고 있으며, 대학에서 배우는 '테일러 정리'를 써서 풀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반면 EBS 강사는 닮음비(중2 교육과정)와 sin법칙(고2 교육과정)을 이용하면 편하게 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킬러 문항 여부를 가리는 데 활용할 그나마 객관적인 지표는 문항별 정답률이다. 그러나 교육부는 정답률 공개 관련 논의는 2025학년도에 한다는 방침이다.

결론적으로 지금 같은 두루뭉술한 기준이면, 여러 개념을 조합했거나 표현에 변화를 줬을 뿐 교육과정에서 출제된 문항도 킬러 문항 논란에 휩싸일 수 있다.

'물수능' 우려가 커지자 교육부는 '출제 기법 고도화'로 변별력을 확보하겠다고 나섰지만, 이마저도 추상적이라 와 닿지 않는다.

수능이 반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 자꾸 알쏭달쏭한 방침만 내놓으니 수험생과 학부모의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다. 킬러 문항 대신 준킬러 문항이 대거 출제될 것이란 전망이 퍼지자 '준킬러 마케팅'에 나선 학원이 등장한 것만 봐도 사교육 시장의 가장 큰 동력은 '불안'이란 걸 알 수 있다.

대학 서열화와 상대평가 체제가 건재한 상황에 킬러 문항 한두 개 없애고 광고 문구 좀 단속한다고 학원을 줄일 학부모가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안쪽 책상'이 높은 고소득·고지위 일자리를 보장하고, 나아가 행복과 결부되는 사회 구조가 지속되는 한 사교육 수요는 절대 줄지 않는다.

보다 근본적인 사교육 대책 방안을 찾으려면 정부는 시험지 밖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그럼 30년 가까이 이어져 닳고 닳은 수능 자체의 한계를 살피고, 대입 개편 방안의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