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가요] 1970~80년대 대한민국 가요계 평정한 쌍둥이 자매 그룹 '바니걸스'…20년 만에 돌아왔다

입력 2023-07-03 14:26:27 수정 2023-07-03 19:13:13

토끼 눈 닮은 쌍둥이 자매, 7080년대 호령
2016년 쌍둥이 언니 고정숙 씨 별세 후 활동 잠잠
홀로서기 용기 낸 동생 고재숙 씨, 5월 음원 발매

바니걸스 고재숙 씨. 배주현 기자
바니걸스 고재숙 씨. 배주현 기자

"위문 공연 가면 군 장병들의 환호가 얼마나 컸는지…. 우리는 '원조 군통령'이었죠."

<파도>, <노을>, <보고 싶지도 않은가 봐> 등 연이은 히트곡으로 1970, 80년대 대한민국 가요계를 평정했던 쌍둥이 자매 '바니걸스'의 고재숙 씨가 팬들 곁으로 돌아왔다.

쌍둥이 자매의 눈이 토끼를 닮았다 하여 지어진 그룹명 '바니걸스'. 활발한 활동 끝에 90년대 해체했고 2000년대 들어서 재기를 꿈꿨지만, 2016년 언니 고정숙 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또다시 활동을 접어야 했다. 언니를 잃은 슬픔에 좀처럼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고재숙 씨가 최근 다시 마이크 앞에 섰다.

바니걸스. 고재숙 씨 제공
바니걸스. 고재숙 씨 제공

◆토끼 눈 닮은 소녀들…7080년 호령

지난 1일 대구의 어느 커피숍에서 만난 고재숙 씨는 가요계에 첫발을 내디뎠을 당시를 회상했다.

어릴 적 가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 자매. 그들을 '바니걸스'로 탄생시킨 건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딸들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차린 어머니는 딸들의 손을 잡고 고향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갔다. 그렇게 무작정 찾아간 유명 작곡가 신중현 씨. "우리 딸들 노래 한 번만 들어봐 달라"는 간곡한 부탁에 자매는 우여곡절 끝에 신 씨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고 씨는 "당시 쌍둥이는 흉이었다. 나는 놀림을 많이 받아 열등감에 꽉 차 있던 18살 학생이었다. 가수는 '딴따라'라고 대다수 부모는 반대한 직업이었지만, 우리 엄마는 신여성이었다"며 "신 씨를 찾아갔는데 테스트 안해준다 하니 엄마가 생떼를 썼다. 그때 펄시스터즈 '님아/커피 한 잔'이 유행했는데, 그걸 불렀더니 신 씨가 서울에 정착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쌍둥이 자매는 가수의 길을 밟았다. <파도>, <노을> 등 노래를 연이어 히트시킨 것은 물론 유명 팝송을 한국노래로 바꾼 번안곡도 많이 불렀다.

바니걸스. 고재숙 씨 제공
바니걸스. 고재숙 씨 제공

바니걸스는 '원조 군통령'이기도 했다. 1천 회 이상 부대에서 위문공연을 하면서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웠고 전방 부대에서 고생하는 장병들의 휴가 보내기에 앞장서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웃으면 복이 와요', '고전 유머 극장', '유머 1번지' 등 코미디 프로그램에도 다수 출연하며 예능인으로서의 입지도 다졌다.

80년대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간 바니걸스는 결혼하면서 활동이 점차 뜸해졌다. 2004, 2005년 재기 움직임이 있었지만 무산되면서 언니 고정숙 씨 홀로 노래를 내기도 했다. 그러다 2016년 큰 시련이 찾아왔다. 고정숙 씨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다.

고 씨는 "언니가 떠난 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간혹 방송 프로그램이나 상 받으러 오라고 나를 불러주기도 했는데, 내가 혼자 나선들 누가 알아주겠나 싶어 두려웠다"며 "그룹에서 솔로로 전향하는 건 상당히 두려운 일이다. 특히 우린 쌍둥이였기에 더욱 그랬다. 팬들이 보기에도 얼마나 허전했겠나. 언니가 없는 현실이 너무 버거워 많이 울었다"고 회상했다.

5월 17일 발매된 바니걸스 신곡. 유튜브 화면 캡처
5월 17일 발매된 바니걸스 신곡. 유튜브 화면 캡처
최근 음원 녹음에 나선 고재숙 씨. 본인 제공
최근 음원 녹음에 나선 고재숙 씨. 본인 제공

◆홀로 선 동생 "용기와 응원 보내달라"

그런 고 씨는 최근 용기를 냈다. 그의 재능을 썩히기엔 아깝다는 생각에 대구 출신 음반 제작자 김명문 대표와 김정호 작곡가, 도기창 작사가가 힘을 합쳐 고 씨의 재기를 끌어냈다. 20년 만의 복귀다.

지난 5월 17일, 고재숙 씨가 부른 중년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노을빛 사랑>과 <사랑 나비>가 정식 발매됐다. 옛날 전성기 시절 목소리 그대로 짙고 호소력 깊은 고 씨의 목소리는 노래를 한껏 애틋하게 만든다.

20년 만에 녹음실 마이크 앞에선 고 씨의 감회는 남달랐다고 했다. '목소리가 잘 나올까'하는 두려움이 컸지만, 그는 금세 페이스를 되찾았다.

고 씨는 "김 대표께서 더 늦기 전에 노래를 다시 하자고 했지만 처음엔 싫다고 거절했다. 하지만 다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을 하는 바람에 나 자신도 다시 쾌활해졌다. 첫 녹음 당시 긴장되고 흥분됐다. 하지만 두어 번 목을 풀고 나니 자신감이 생기더라"고 했다.

도 작사가도 "요즘은 초혼 연령이 늦어지는 시기다. 4050대 초혼을 하는 이도 많고 5060대에 재혼을 하는 사람도 많다. 인생의 반환점 시기에 만난 마지막 사랑은 '당신'과 함께 하고 싶다는 염원을 담았다"며 "애틋한 가사가 고 씨의 목소리와 잘 맞아 떨어졌다"고 말했다.

고재숙 씨와 작사가 도기창 씨. 배주현 기자
고재숙 씨와 작사가 도기창 씨. 배주현 기자

이를 계기로 고 씨는 향후 방송 재기도 약속했다. 고 씨는 대구경북 팬들에게 "방송예능 쪽에도 출연을 준비하고 있다. 그동안 방송을 무서워했지만 이제는 용기를 내려고 한다"며 "앞으로 저 혼자 방송에 나와도, 보이진 않지만 우리 언니가 같이 서 있구나 생각하고 봐주시면 좋겠다. 건강하게 노래할 테니 용기와 박수를 보내주시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