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칼럼]투본 강의 뱃사공들

입력 2023-07-02 17:14:22 수정 2023-07-03 06:07:54

이상헌 뉴스국 부국장
이상헌 뉴스국 부국장

베트남 중부의 다낭은 요즘 한국인 관광객들로 북새통이다. 현지인들의 서툰 한국말 호객 소리가 어딜 가나 들릴 정도다. 저렴한 물가, 다양한 직항 노선, 호이안·후에 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최신 리조트·놀이공원의 공존이 인기 요인으로 꼽힌다.

한류(韓流) 체험의 하이라이트는 '투옌퉁 투어'이다. 바구니 모양의 전통 대나무배를 타보는 관광 코스로 소개되지만 실상은 수상무도장(水上舞蹈場)이다. 투본강 곳곳에 설치된 조악한 무대에서 한국 트로트 유행가에 맞춰 뱃사공과 관광객이 춤판을 벌인다.

아무리 베트남의 한류가 거세다곤 해도 그 풍경이 충격적이었던 건 다낭과 한국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다. 대구의 자매·우호도시이기도 한 다낭은 베트남전쟁 때 우리 청룡부대가 주둔한 곳이다. 미담만 있었으면 좋겠지만 '불편한 진실'도 없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다낭 인근에서 벌어진 '퐁니·퐁넛 학살'이다. 이 마을 민간인 70여 명은 안타깝게도 1968년 2월 12일 한국군에 의해 생명을 잃었다. 베트남에서 미군이 저지른 만행의 대표적인 예로 꼽히는 '미라이 학살'과 비견되는 흑역사이다.

55년 전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해 우리 법원은 지난 2월 '피고 대한민국'의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1심 재판부는 한국군의 명백한 불법행위라며 3천만100원을 피해자 응우옌티탄 씨에게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국가 배상 소송의 최소 신청 금액은 3천만 원이다.

국방부가 항소하면서 한국 정부의 책임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잊을 만하면 나오는 일제강점기 관련 일본의 망언에 대응하는 우리 정부의 자세와 비교하면 모양새가 빠지는 일이다. 현 정부가 내세우는 '글로벌 중추 국가'다운 행보도 아니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베트남 순방 동안 과거사 문제는 논외였다. 보 반 트엉 국가주석은 "서로를 지지하는 중요한 파트너"라고 했고, 권력 서열 1위 응우옌 푸 쫑 공산당 서기장은 "한국은 베트남이 닮고자 하는 최적 모델"이라고까지 치켜세웠다.

양국은 대신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 이행을 위한 행동 계획에 합의했다. 경제·안보협력 강화가 서로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국은 2030년까지 유상 원조 40억 달러를 지원하고, 2024~2027년에는 무상 원조 2억 달러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다고 베트남 정부가 투본강의 뱃사공들처럼 한류에 푹 빠졌다고 착각해선 곤란하다. 윤 대통령 방문 직후인 지난달 27일 팜 민 찐 총리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전면적 전략협력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길 원한다"고 밝혔다. 시 주석 역시 "양국은 호혜와 공영의 동반자이며 친한 친구"라고 맞장구쳤다.

결국 베트남은 중국과 미국의 경쟁 속에서 자신의 지정학적 특징을 활용해 실리를 챙기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미군 항공모함이 베트남전 종전 이후 세 번째로 다낭에 기항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낭 앞바다 파라셀군도(베트남명 호앙사군도, 중국명 시사군도)는 베트남과 중국의 영유권 분쟁 지역이다.

최근 주한 중국대사의 발언으로 반중 감정이 높아지면서 여당 대표는 국내 중국인들의 투표권·건강보험 제한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상호주의에 맞지 않다는 지적에는 공감하지만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더 많을까 봐 걱정스럽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던 베트남의 늙은 뱃사공이 차라리 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