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이 낳고 엄마에게 효도하겠다고 울먹였지만, 그 맹세는 그때뿐…"
호박꽃이 필 무렵이면 엄마가 그리워진다. 20여 년을 엄마랑 살다가 한 남자를 만나 내 행복만을 위해 파랑새가 되어 날아가 버린 날들이 늘 애잔하기만 했다. 만약에 결혼하였다 해도 가까운 거리에 살았다면 그 마음이 덜 했을 수도 있겠다.
결혼 후, 거리가 좀 있는 울산에서 20 여 년을 살고 다시 귀향했다. 엄마는 울산으로 우리 애들을 보러 오는 날이면 언제나 오렌지 알갱이가 있는 음료수 한 박스를 사 들고 오셨다. 울산 가게 어디든 파는 음료수인데도 딸 집에 갈 때 사갈 선물이라며 미리 집에 사두었다가 들고 오시는 걸 즐기셨다. 지금도 우리 딸들은 외할머니를 추억하는 것 중에 하나가 오렌지 알갱이가 살아 있는 그 음료수이다. 아이들은 외할머니가 사 오신 오렌지 음료수를 최고의 맛으로 알고 마셨다.
겨울에는 서문시장에서 외손녀들에게 입힐 분홍색 누비 내복을 사오셨다. 내복을 자주 사주는 이유는 내 탓이 크다고 본다. 아이들 입던 내복에 무릎이나 팔꿈치가 닳으면 그 위에 천을 덧대어 동그랗게 수놓듯이 달팽이 모양으로 홈질을 해 입히는 걸 보고 혀를 내둘렀던 엄마였다. 알뜰한 살림살이가 때로는 지독한 삶의 흔적임을 눈치채고는 딸이 주는 용돈을 받으시면 사위에게 고맙다고 전하라는 말을 한 달이 넘도록 하시곤 했으니까.
당신의 삶 속에는 아픔도 많았다. 여섯 남매를 낳았는데 엄마보다 먼저 떠난 자식들도 있었으니 그 마음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버리며 살지는 않았다. 이웃의 한 며느리는 아침에 밥을 하려고 하는데 쌀이 떨어졌다. 시어머니에게 그 사정을 말할 수 없어 우리 엄마를 찾아와 쌀을 빌려 달라고 했던 적이 많았다.
열 식구가 넘는 밥을 놓칠 수 없었던 며느리의 고충을 이해한 엄마는 우리 집 양식 통에 바닥 끌리는 소리가 나도 거절 없이 쌀을 퍼주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 며느리는 우리 사촌 올케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곤 한단다. 엄마는 봄날 호박 씨앗을 뿌릴 때부터 누렇게 익을 호박을 그리며 웃었다. 자식들도 호박처럼 잘 익어가길 바람 하였을 것이다.
엄마와 난 얼굴도 닮았고 감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엄마의 진정한 삶만큼 살아내진 못했다. 솔직히 엄마와 달리 난 욕심도 있는 편이다. 첫 아이를 낳고 병원을 찾아온 엄마에게 첫 마디가 나를 낳아 키워 주었으니 효도하겠다고 울먹였지만, 그 맹세는 그때 뿐이었던 것 같아 미안할 뿐이다.

엄마는 올해로 하늘나라로 가신 지 20년이 되었다. 엄마로부터 받은 유산은 엄마가 쓰던 체크 지갑과 그 속에 담긴 오만 원 정도의 돈 그리고 어릴 때 사준 나일론 목도리가 있다.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며 엄마가 그리울 때 꺼내본다. 지갑 속에 들어 있는 오만 원 정도의 돈은 내가 이자를 쳐서 좋은 일에 쓰기로 마음먹고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
내 스스로 이자를 많이 쳐서 유용한 곳에 쓰고, 엄마가 준 소중한 유산을 늘리는 일에 노력하고 싶다. 한동안 이자를 많이 모이게 하는 데 게을렀다. 다시 시작하려니 가슴이 두근거린다.호박 씨앗 하나가 자라 많은 결실을 맺듯이, 나 또한 엄마의 딸로 거듭 나는 삶을 통해 작은 결실이라도 맺어야겠다. 호박꽃 필 무렵이면 못내 당신이 그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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