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기술 변곡점과 전략적 탈출

입력 2023-06-26 20:01:49

석민 디지털논설실장
석민 디지털논설실장

시가총액 1조 달러(약 1천324조 원)는 '꿈의 시가총액'으로 불린다. 우리나라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의 시가총액(5월 말 기준)이 426조 원 정도니까 거의 3배 수준이다. 현재 세계에서 5개 기업만이 유지하는 몸값이고, 단 한 번만이라도 달성한 업체를 모두 합쳐도 9곳에 불과하다. 중국의 국영 석유 기업 페트로차이나와 사우디 국영 석유 기업 아람코롤 제외하면, 대부분 인류의 삶을 바꾸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는 시기인 기술 변곡점에서 신기술을 주도한 기업이 영광을 차지했다.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모회사 알파벳, 소셜 미디어 업체 메타(옛 페이스북), 테슬라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 5월 30일 미국 엔비디아가 반도체 업체 최초로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달성했다. 챗GPT로 대표되는 '거대 인공지능(AI)' 열풍 속에 이룩한 또 하나의 신화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 개선에 대한 기대감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AI 데이터 처리에 필요한 고대역폭 메모리(HBM) 기술을 선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엔비디아가 개발한 H100 원가에서 HBM과 DDR5 비중은 3% 및 2%에 불과하다. 이렇게 되면 현재의 삼성과 SK는 인공지능 세상의 주변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제는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가 주인공인 시대인 탓이다.

엔비디아는 '컴퓨팅 혁명'이란 비전을 갖고 2006년 GPU용 프로그래밍 언어 쿠다(CUDA)를 출시했고, 2012년쯤 쿠다를 이용한 AI 모델 훈련을 시작했다. 초기엔 기존의 CPU 연산 모드에 막혀 힘을 쓰지 못했다. 반면 2010년 스마트폰이 태동하면서 구글 안드로이드와 엔비디아는 좋은 파트너였다. 하지만 엔비디아는 컴퓨팅 혁명이란 비전에 맞춰 스마트폰 시장에서 빠르게 철수하는 '전략적 탈출'을 감행했다. 현재보다 미래를 선택한 셈이다. 덕분에 요즘 엔비디아는 챗GPT 등 거대 AI 개발을 위한 GPU 시장의 90%를 장악하고 있다.

그렇다고 낙담만 할 일은 아니다. 퓨리오사AI, 리벨리온 등 한국 토종 팹리스 스타트업이 엔비디아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래는 재벌 기업이 아니라 벤처 스타트업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팹리스를 비롯한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 조성이 시급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