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205>단옷날 벽사진경의 홍선

입력 2023-06-16 13:39:00 수정 2023-06-19 07:35:45

미술사 연구자

이응노(1904-1989),
이응노(1904-1989), '산수', 1953년(50세), 붉은 종이에 채색, 22×62㎝, 개인 소장

붉은 색지 부채 홍선(紅扇)에 그린 이응노의 '산수'다. 붉은색은 전통적으로 잡귀를 쫓고 경사를 부르는 벽사진경(辟邪進慶)의 색으로 여겨져 팥 시루떡을 돌상이나 생일상, 고사상에 올렸고, 새색시의 볼과 이마에 연지곤지를 찍어 붉은색에 부여된 주술적 힘을 활용했다.

오른쪽 아래에 이응노의 호 고암(顧菴)과 낙관이 있는데, 왼쪽에 "계사(癸巳) 단양절(端陽節) 위(爲) 송은선생(松隱先生) 사어(寫於) 담완재서실(覃阮齋書室) 석등하(石藤下) 고암생(顧菴生)"으로 제화를 또 써 넣었다. 그래서 1953년 단옷날 서예가 손재형의 집 담완재에서 송은 이병직에게 그려주었다는 이 그림의 내력을 알 수 있게 됐다.

이응노에게 이병직은 김규진 문하의 동문 선배이기도 하고, 이병직이 고려미술원에서 사군자를 가르칠 때 배웠던 스승이기도 하다. 이병직과 손재형은 서예가이자 화가일 뿐 아니라 손꼽히는 미술품 수집가다. 이 두 분은 서로 취미가 통해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만난 날이 마침 단오라 이응노가 선배이자 스승인 이병직에게 상서로운 홍선에 그림을 그려 단오선으로 선물한 것이다.

이응노가 다시 붓을 들어 정중하게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위해 그렸다고 써 넣은 것은 이런 기록이 그림의 의미와 가치를 돋운다는 사실을 수집가인 이병직이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근경의 소나무와 나무, 기와 지붕 등은 손재형의 집 담완재이고 먼 산과 산 위의 누각은 여기에서 보이는 풍경이다. 앞쪽의 흰 꽃과 녹색 넝쿨은 제화에 써 놓은 석등으로 오뉴월에 흰 꽃이 무성하다. 붓질은 형태를 그려내고 있지만 묘사한다기보다 독자적인 표현성과 리듬으로 출렁인다. 구체적 형태 속에 추상적 붓질이 섞였고, 대상을 파악하는 방식에는 산수화의 시각과 풍경화의 시각이 혼재한다.

묵죽화가로 출발한 이응노는 모필 붓에 먹을 찍어 종이에 그리는 방식을 화가로서의 생애 내내 고수했다. 사군자와 서예를 계속했지만 왕성한 열정과 실험정신의 소유자였던 이응노는 추상화도 그렸고 산수, 풍경, 인물 등 다양한 회화 세계를 펼쳤으며 입체 작품도 만들었다.

이응노는 지필묵이라는 오래된 매체를 놓지 않았고 현실과 주변에 대한 관찰과 애정도 멈추지 않았다. 이 부채그림이 보여주듯 이응노의 붓은 동양화의 고답적 형식미에 머물지 않았다.

태양이 뜨거워지는 단오는 부채 선물 외에도 풍속이 많았다. 오색실을 엮어 만든 실 팔찌 장명루(長命縷)를 팔목에 둘러 왕성한 단옷날 기운을 받았다. 흑백적청황의 오방색으로 천하 만방의 액운을 막아주고 무병장수를 가져와 오채사(五彩絲), 속명루(續命縷)라고 했다. 목요일이 단오다.

미술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