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혜 수필가
천연식초를 만들었다. 작업은 복잡하고 고되다. 우선 정성 들여 재료를 씻고 삶고 팔이 아프도록 치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세세한 부분까지 소독은 필수다. 초산에 잡균이 침범하면 식초는 상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나치리만큼 정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발효와 숙성을 반드시 거쳐야 식초가 된다. 오래 묵힌 것일수록 좋다지만 그냥 시간만 많이 흐른다고 좋은 식초가 되는 건 아니다. 발효가 끝난 후 알맞은 조건에서 제대로 잘 숙성시켜야 맛이 깊고 풍부해지는 것이다. 숙성과정은 재료들이 제각각의 성질을 삭이고, 서로 품고 고요해지는 시간이라 할 수 있겠다.
원로 작가 선생님을 오랜만에 만났다. 몇 년간 서로 격리하느라 만나지 못하다 보니 소식 전하는 일도 소원했다. 선생께서 글을 어디에 발표하는지 몰라 따로 읽을 기회가 없었다. 안부를 나누고 언제쯤 다음 책이 나오는지 여쭙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절필했어요."
순간 당황하고 의아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글을 발표하던 분이기 때문이다. 내 표정을 읽으셨는지 말씀을 이었다. "어느 순간부턴가 글을 써놓고 보니 마음에 안 차기 시작하더군요. 신선함도 없고 기발하지도 않고. 글이 안 되기 시작하면 펜을 놓으란 말이 있지요. 그래서 쓰지 않게 됐어요."
그러면서 많은 것을 내려놓으셨다고 한다. 울컥했다. 연세가 들긴 했지만 늘 당신의 품성처럼 따뜻하고 기품 있는 글을 쓰시던 분이라 흠모하고 있던 터였다. 어머니로, 아내로, 선배 작가로 당신의 자리를 잘 지키며 살아오신 것을 아는 까닭이다.
내려놓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대부분 자신은 아직은 놓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움켜쥐기 위해 골몰한다. 한 자리를 내놓고, 한 걸음 물러서 준다면 다음 사람은 더 잘할 텐데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을 신념이라 착각하는 건 아닌지. 자리건 재물이건 욕심이란 게 심통을 부리니 쉽지는 않은 일이리라.
안타까워하는 내게 선생께서 온화한 미소로 말씀하신다.
"여기서 더 욕심 부리면 추해질 일밖에 없겠지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억지로 밀어붙이면 결과는 뻔한 법이지 않겠어요?"
고목의 열매가 더 달다고 한다. 혹독한 여름과 겨울을 묵묵히 견디며 풋기를 잘 삭이고 숙성한 덕이리라. 평생 써오던 펜을 놓고 건강이 많이 상했음에도 저리 평온한 모습이라니, 선생께서는 숙성을 거쳐 완숙을 이루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효가 끝난 식초를 숙성실로 옮긴다. 무던히 기다리면 좋은 식초를 만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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