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추와 쇠붙이, 겨울옷 등만 발견…1980년대 가창댐 확장 공사 영향 준 듯
희망의 끈 놓치 않는 유족들 "유해 한 점이라도…간절히 기도"
6‧25 전쟁 전후로 대구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해 발굴 작업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유족들은 애끓는 마음으로 발굴 소식을 기다리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7일 오후 2시쯤, 대구 달성군 가창면 가창용계공원 등산로를 따라 약 250m쯤 올라가니 삽으로 땅을 파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30도에 육박하는 더위 속에서 발굴 담당 기관인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조사단 3명과 인부 8명으로 구성된 발굴단은 '가창골 학살' 피해자들의 유해를 찾고 있었다.
주변 땅은 30~50cm 깊이로 파헤쳐져 속살을 훤히 드러냈고, 흙을 담은 포대 백여 개가 쌓여 있었다. 발굴 터 한편에는 인부들이 호미를 쥔 채 조심스레 흙을 들어내는 작업을 이어갔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의 윤병일 조사원은 "발굴 작업은 90% 정도 진행됐다. 팔 수 있는 땅은 다 팠다고 보면 된다"며 "작은 뼛조각이라도 찾기 위한 '체질 작업' 정도만 남았다고 보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5일부터 가창면 용계리 산 89-6번지 일대(225㎡)에서 벌어지는 유해 발굴 작업은 오는 12일부터 복토(覆土) 작업이 예정된 만큼,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발굴지를 선정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는 인근 주민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가창골 학살 희생자 유해 약 30여 구가 매장돼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별다른 성과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추와 쇠붙이, 겨울옷 등 희생자와의 관련성이 명확하지 않은 물품 10여 점 발굴됐을 뿐이다. 이처럼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온 데에는 ▷1980년대 가창댐 확장 공사로 주변 지형이 바뀐 점 ▷산의 지형적 특성상 증언만으로 장소를 특정하기 어려운 점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유족들은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국가 폭력에 의해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아야 했던 희생자들의 한을 달래기 위해선 작은 뼛조각 하나라도 찾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채영희 10월 항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장은 "유해 한 점이라도 나오면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모두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여기서 작은 증거가 나와야 진실 규명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며 "현재 발굴지 규모가 너무 협소하다는 점은 아쉽다. 유족들이 유해 매장 가능성이 크다고 지목한 가창면 상원리 일대였다면 결과가 달랐을 것"이라고 했다.
이과 관련 진화위 관계자는 "이번 2기 진화위에서는 추가적인 대구지역 유해 발굴사업은 없다. 다만 유해를 발굴할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닫힌 건 아니다"라며 "유족들이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 등을 통해 자체적으로 발굴 작업을 추진하는 방법도 있다"고 밝혔다.
1950년 7월에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가창골 학살은 당시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자들이 가창골짜기를 비롯해 경산 코발트 광산, 본리동 빨래터 등지에서 집단 살해된 사건이다. 당시 대구경북지구 CIC(방첩대)와 3사단 22연대 소속 헌병대, 경찰 등이 최소 1천400명 이상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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