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진나라 동쪽 끝은 산둥반도…북쪽은 조선 땅"
10년간 한·조·위·초 등 멸망시켜…중국 통일 대업 완성했던 진시황
사마천이 쓴 진시황본기 따르면 '강역 끝에는 동해 있다' 못 박아
진나라 동쪽 끝자락 현재 산동성 성산에 기념비 세워 국경선 표시
▶최초로 중원을 통일한 진시황
진시황 영정嬴政(서기 전 259~서기전 210)은 진장양왕秦庄襄王과 조희趙姬의 아들로서 조나라 서울 한단邯鄲에서 태어났다. 진시황 영정은 조정趙政, 영정呂政으로도 불린다. 성姓이 3개나 되는 것을 보면 그의 출생과정과 유년생활이 순탄치 않았음을 말해준다.
진시황은 13세에 왕위를 계승했는데 이사李斯, 왕전王翦 등을 중용하여 서기 전 230년~서기전 221년까지 약 10년 동안 한, 조, 위, 초, 연, 제6국을 차례로 멸망시켜 중국 통일의 대업을 완성하고 중앙집권적 다민족통일국가 진왕조를 건립했다.
진시황은 6국을 통일하고 나서 자신의 "덕은 삼황을 겸비하고 공로는 오제를 초과한다"라고 하여 삼황의 황 자와 오제의 제 자를 따서 황제라 호칭하였다. 중국역사 상에서 최초로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한 군주이기 때문에 황제에 시始 자를 추가하여 시황제라 자칭하게 된 것이다.
진시황은 중앙에서는 삼공구경三公九卿 제도를 시행하여 권력을 분산시켰고 지방은 분봉 제를 폐지하여 군현제로 바꾸었다.
통일 이전에 국가마다 다르게 사용하던 문자와 화폐와 도량형을 하나로 통일시켰다. 북쪽으로 흉노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백월을 정벌하고 만리장성을 축조했다.
장강과 주강의 물길을 소통시키고 요즘으로 치면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치도馳道와 직도直道를 건설하여 사방의 교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진시황은 분서갱유와 같은 몇 가지 실정 탓에 평가절하되어 있지만 사실 그는 혼란한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 통일의 새로운 시대를 연 위대한 정치가요 개혁가였다.
정치제도, 경제발전, 문화향상 등 여러 면에서 진시황은 그 후 중국 2천년 역사의 기초를 다진 지도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그가 동쪽으로 순행하던 도중 하북성 사구沙丘 땅에서 갑자기 병사하는 바람에 천하통일의 꿈은 이루었지만 이를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권력욕에 눈먼 조고趙高, 이사李斯가 거짓 조서詔書를 꾸며 유능한 태자 부소扶蘇와 명장 왕전王翦 등을 살해하고 실권을 장악, 결국 2세에서 나라가 망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시황은 산동성 동쪽의 성산成山과 지부之罘까지 왔다
치우의 후손 흉노족 모돈선우冒頓單于(?~서기전 174)와 단군의 자손 선비족 단석괴檀石槐(137~181)는 만리장성의 안과 밖을 지배하여 그들의 광활한 영토는 알렉산더 대왕을 초과했다.
만리장성의 안과 밖을 손아귀에 넣고 굴복시킨 모돈선우와 단석괴는 동이족이고 아시아를 넘어서 유럽으로 뻗어나가 세계를 제패한 징기스칸 역시 동이족이었다.
진시황은 최초로 중원을 통일한 인물이다. 만리장성 넘어 북방의 흉노를 통일하지는 못했다. 한고조 유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영향력은 중원지역에 한정되었고 만리장성 넘어까지 확대되지는 못했다.
한족, 한자, 한문화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금 중국은 유방이 세운 한나라로 대표되는데 사실 서방에서 중국을 호칭하는 명칭 china는 진秦나라에서 유래했다. 진시황이 바로 그 중원 최초의 위대한 통일제국을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오늘날 2,200년 전 진시황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펴보는 데 있어 최고의 참고자료가 되는 것은 2,000년 전 사마천이 쓴 진시황본기이다.
'사기' 진시황본기 26년조에 따르면 중국 통일 후 진秦나라의 동쪽 국경을 설명하면서 "땅이 동쪽으로 바다와 조선에 이르렀다(地東至海曁朝鮮)"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한 바다는 어떤 바다를 가리킨 것인가. '사기정의'에 "이 바다는 발해의 남쪽 양주, 소주, 대주 등지에 이르는 동해를 가리킨다(海謂渤海南 至揚蘇臺等州之東海也)"라고 하였다. 진나라의 동쪽 국경선에 있던 바다는 발해가 아니라 동해라고 분명하게 못 박아서 말하고 있다.
또한 진시황본기 28년조에서는 진나라의 동, 서, 남, 북의 강역을 설명하면서 "동쪽에는 동해가 있다(東有東海)"라고 아예 동해를 콕 집어서 말하기도 하였다.
이런 기록에 비추어본다면 진시황시대 동쪽 강역 끝은 발해가 아니라 동해였던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그리고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뒤에 여러 차례 동쪽으로 순행했는데 그때 갔던 곳이 현재의 산동성 위해시威海市에 있는 성산成山과 연태시烟台市에 있는 지부산芝罘山이다.
성산은 산동성 동쪽 끝에 위치한 해발고도 200미터 밖에 되지 않는 낮은 산인데 삼면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육지에 연해 있다.
진시황은 이곳을 서기전 219년, 210년 두 차례 방문했고 "하늘이 끝난 곳(天之盡頭)"이라고 지칭했다. 진 승상 이사李斯는 '천진두天盡頭' '진동문秦東門'이라고 손수 써서 이곳에 비석을 세웠다.
'천진두'는 중국의 천하가 끝나는 곳이라는 의미이고 '진동문'은 여기가 중국의 동쪽 관문이라는 뜻으로 여기까지가 중국 땅이고 밖은 다른 나라임을 명시하고 있다.
지부之罘는 청나라 때부터는 지부芝罘라고 표기했다. 지부는 중국 산동성 동단에 있는 최대의 연륙도連陸島로서 면적은 11. 5㎢에 달한다. 진시황은 재임 기간 중 발해와 동해의 분기점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을 세 차례나 방문했다.
진시황은 여기에 자신의 천하 통일을 기념하는 공덕비를 세웠는데 사마천의 진시황본기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성산까지 가고 지부에 올랐다. 비석을 세워 진나라의 덕을 칭송하고 떠났다.(窮成山 登之罘 立石頌秦德而去)"
진시황은 당시 산동성 동쪽 끝에 있는 성산과 지부에 갈 때 "발해 내주만 부근을 따라서 동쪽으로 황현, 수현을 거쳐서 갔다. (幷渤海而 東過黃睡)"라고 진시황본기는 기록하고 있다.
'사기정의'에 "모평현이 옛 수현이다.(牟平縣 古睡縣也)" "문등현이 옛 수현이다.(文登縣 古睡縣也)"라고 하였고 '사기집해'에서는 "지부산이 수현에 있다(之罘山 在睡縣)"라고 하였다.
현재의 중국 지도 상에 상동성 동쪽의 지부구芝罘區 부근에 모평구가 있고 성산 부근에 문등시가 보인다. 이는 진시황이 당시 현재의 산동성 모평구와 문등시 일대를 거쳐서 성산과 지부를 방문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 지도 상에 진시황이 방문했던 산동성 동쪽의 성산과 지부, 경유지인 모평현과 문등현이 모두 나와 있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시황은 하북성 진황도시에 온 일이 없다
진황도시는 현재 해항구, 산해관구, 북대하구, 무녕구, 창려현, 노룡현, 청룡만족자치현을 관할하고 있다. 현대중국에서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 천하를 36군으로 나누었고 진황도시는 요서군에 소속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진나라의 동쪽 강역은 오늘날의 산동성 동쪽 끝에 이르렀고 진시황은 그 동쪽 끝에 있는 성산과 지부까지 왔으며 여기에 중국의 영역임을 표시하는 국경비 내지는 공덕비 성격의 기념비를 세웠다. 이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진시황의 영토가 만일 발해만의 진황도시 북대하, 노룡현, 산해관 일대에 이르렀다면 북대하나 산해관에 국경비를 세우지 왜 산동성 성산과 지부에 건립했겠는가.
진나라의 동쪽 국경선은 왜 발해가 아닌 동해에서 끝났고 진시황의 발걸음은 산동성 끝자락인 성산과 지부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산동성 북쪽 발해만의 진황도시 북대하, 노룡현, 산해관 일대에는 고조선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진시황시대의 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이 아닌 발해만 유역에 위치해 있었고 그래서 진시황은 진나라 국경인 동해 바닷가 지부, 성산에 와서 자신의 송덕비와 국경비를 세웠던 것이다.
필자가 30년 전 성산을 방문하였을 때 그곳에는 거대한 진시황 동상이 바다를 굽어보며 서 있었다. 전 중국에서 유일하게 이곳에 진시황을 모신 사당 시황묘가 보존되어 있는 것도 이 지역과 진시황의 깊은 인과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 동해의 끝자락 산동성 성산, 지부까지 왔었던 것은 확실하다. '사기' 진시황본기가 그것을 증명하고 현재의 중국 지도상에서 그 지명의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시황이 하북성 진황도시에 왔다는 것은 한족의 영토 야욕주의가 만들어낸 터무니없는 낭설이다.
한족들은 우리 밝달민족이 지난날 대륙에 남긴 발자취들을 하나하나 지우더니 이제는 한 술 더 떠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며 한반도의 역사주권마저 빼앗으려 든다. 아! 그 끝은 어디인가, 두렵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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