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좋은 '노룡현' 고조선에서 시작
구석기∼청동기 인류문화 발상지…위치 좋아 외국인에 일찍이 개방
'고조선 건국' 내용 담긴 사료 확인…조선성 유적 기록이 사실 뒷받침
조선현→노룡현 변경 결정적 단서
연결고리 은폐하려는 한족의 의도…지명 달라져도 발해조선 흔적 남아
◆조선성이 있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은 인류문화의 발상지
중국 북경 동남쪽에 있는 진황도시 노룡현은 한반도와는 무려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필자가 30년 전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서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다는 기록을 발견하고 처음 이곳을 방문할 때 북경까지는 비행기로 가고 북경에서 다시 진황도시까지는 기차를 이용해 밤새워갔던 기억이 새롭다.
노룡현은 총 면적이 961㎢로 한국의 수도 서울보다도 훨씬 넓다. 인구는 현재 41만 5천 명이 거주하고 있다.
수도 북경까지 거리는 225㎞인데 기차가 진황도시까지 수시로 다닌다. 북경을 거쳐 심양까지 가는 고속도로는 동서를 관통하고 있다.
우리는 북경시 주구점周口店에 세계적인 북경원인北京猿人 유적이 있다는 것은 알아도 하북성 노룡현에 무산원인武山猿人 유적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한다.
1976년 진황도시 노룡현의 무산武山 북측 동굴에서 동물화석과 불에 탄 재 등이 있는 유적을 발견했는데 1982년 북경 고척추동물연구소의 감정을 거친 결과 50만년~100만년 전 인류의 생존 유적으로 판명되어 '무산원인 유적'이라고 명명하였다.
시기적으로 북경원인 유적보다도 빠를 수 있는 노룡현의 무산원인 유적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유물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산해관구 소모산小毛山과 고건장高建庄에서는 신석기시대 유적이, 노룡현 서쪽 난하 유역에서는 청동기시대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는 노룡현 일대에서 구석기시대로부터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를 거쳐 인류가 생존해 온 인류문화의 발상지임을 말해준다.
노룡현은 1988년에 대외개방구역으로 확정되었다. 90년대 초 중국은 낙후하여 외국인의 출입이 제한된 지역이 많았다. 노룡현은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 각종 시설은 현대화되어 외국인의 민박까지 가능했다.
80년대에 벌써 외국인의 자유로운 출입을 허락했다는 것은 노룡현의 자연환경과 교통조건이 얼마나 좋은 곳인가를 짐작게 한다.
◆현대 중국에서는 노룡현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중국 현대문헌에서 노룡현에 대해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은나라 때는 고죽국孤竹國의 국도였고 진나라 한나라 시대에는 요서군에 속한 땅이었다. 동진 16국 시기에 전연, 후연, 북연에 소속되었고 북위 시기에는 평주 관할에 귀속되었다.
노룡현 지역은 북위 시대까지는 비여현, 비이현, 신창현 등으로 불리다가 수나라 개황開皇 18년(598) 노룡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605년 수나라에서 북평군을 설치하고 노룡현을 소속시켰다.
당나라, 요나라, 송나라, 금나라 때는 평주에 소속되었다. 원나라 때는 흥평부와 영평로에, 명나라 청나라때는 영평부에 소속되었다.
1913년 중화민국시기에 영평현으로 고쳤고 1914년 다시 노룡현으로 환원시켰다. 1958년 노룡현을 철폐하고 천안현 창려현으로 귀속시켰다가 1961년 다시 노룡현을 설치하고 당산지구에 소속시켰다. 1983년 5월에 당산지구를 철폐하고 진황도시에 소속시켰다."
이것이 근, 현대 중국 문헌에서 노룡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내용 전부이다.
명, 청시대 이후 노룡현을 소개하고 있는 중국 자료에서는 노룡현의 역사가 고죽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뿐 고조선에 대한 기록은 단 한 줄도 보이지 않는다. 근, 현대 중국문헌에서 노룡현의 조선성 기사는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다.
그런데 필자가 최초로 남북조시대 유신庾信이 쓴 선비족 '두로공신도비문豆盧公神道碑文'에서 "조선이 건국을 하고 고죽이 임금이 되었다(朝鮮建國 孤竹爲君)"라는 기록을 발견함으로써 고죽국 이전에 조선이 먼저 거기서 건국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두로공신도비문'은 노룡현에서 시작된 고죽국의 역사는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조선에 가서 닿게 된다는,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준 것이다.
송나라 때 4대 사서 중의 하나인 '태평환우기'에서는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두로공신도비문'의 "조선이 고죽국에 앞서 노룡현 지역에서 건국했다"는 주장이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뒷받침한다.
또한 조선현이 신창현이 되고 신창현이 노룡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 '수서'의 기록은 현재의 하북성 노룡현에 송나라 때까지 조선성 유적이 남아 있었던 원인을 설명하는 결정적인 자료가 된다.
동일한 지역이지만 정치적 상황이 변동함에 따라서 조선국, 고죽국으로 다시 조선현, 노룡현으로 명칭의 변경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노룡현은 현재 하북성 진황도시에 소속되어 있는데 노룡현이 진황도시 관할이 된 것은 불과 40년 전의 일이다. 100년 전에 노룡현은 만주족 청나라 영평부 땅이었고 2,000년 전엔 요서군 지역이었으며 3,000년 전엔 동이족 고죽국의 국도였고 필자가 새로 발굴한 자료 '두로공신도비문'에 의하면 4,000년 전엔 우리 한민족의 고조선이 건국한 땅이다.
한반도를 무대로 살아가는 현대 한국인들에게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은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이다. 꿈에도 그곳이 고대 한국인들의 생활공간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바다와 초원과 비옥한 평야가 한데 어우러져 전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살기 좋은 천혜의 땅 발해유역 진항도시 북대하, 노룡현 일대는 먼 옛날 4,000년 전 한국인의 조상이 피와 땀으로 일구었던 삶의 터전이다.
◆1,400년 만에 들통난 노룡현에 감춰진 조선성의 비밀,
중국의 하북성은 황하 이북에 있다. 그래서 하북성이라고 한다. 하북성은 동쪽으로는 발해와 맞다 있고 서쪽에는 태행산, 북쪽에는 연산이 있다.
발해유역의 발해만 일대가 고조선의 생활공간이었으므로 고대에 하북성은 고조선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하북성 동남쪽에 있는 노룡현은, 고조선의 도읍지 특히 발해조선의 발상지에 속한다. 그래서 그곳에는 고조선의 흔적이 알게 모르게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541~604)이 598년 노룡현으로 지명을 변경하면서 고조선과 연결된 고리가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지명은 역사가 흐르면서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변경된다. 그러나 오랜 역사가 흐르더라도 어떤 방식으로 든 그 흔적은 남는 것이 또한 지명이 지닌 특징이다.
중국에 남아 있는 동이족이나 한국사 관련 지명들은 한족들의 의도적인 은폐와 말살로 인해 고대 문헌상에는 지명이 나오지만, 현재 중국 지도상에서는 확인이 안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데 발해조선의 흔적이 숨겨져 있는 송나라의 하북도 평주 노룡현은 1,400여 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그 명칭이 바뀌지 않고 현재의 중국 지도상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한족들이 한국사와 관련된 지명들을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중국 지도상에서 지워버린 전례에 비추어 볼 때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수문제는 조선현과 신창현을 통폐합할 때 일반적으로 지명을 변경할 때 사용하는 방식인 신창현에서 신 자를 따고 조선현에서 조 자를 따서 신조현이라 하는 그런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다.
조선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엉뚱한 노룡이란 지명을 갖다 붙여놓았고 노룡현에서 고조선을 연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긴 한족들은 안심하고 이를 1,400년 동안 사용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성의 비밀을 간직한 노룡현은 조선성의 주인인 조선민족을 감쪽같이 속여 넘긴 채 1,0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노룡이란 엉뚱한 이름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태평환우기' 하북도 평주 노룡현 조항 '조선성' 기록의 발견을 통해 1,400년 만에 비로소 노룡현의 속살이 드러났고 노룡현에 감춰진 고조선 역사의 비밀이 들통나게 된 것이다.
이는 역사는 일시적으로 속일 수는 있지만, 영원히 속일 수 없다는 진리를 증명한다. 동북공정으로 한국사 탈취를 시도하는 중국 공산당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하나의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댓글 많은 뉴스
이낙연 "민주당, 아무리 봐도 비정상…당대표 바꿔도 여러번 바꿨을 것"
'국민 2만명 모금 제작' 박정희 동상…경북도청 천년숲광장서 제막
위증 인정되나 위증교사는 인정 안 된다?…법조계 "2심 판단 받아봐야"
박지원 "특검은 '최고 통치권자' 김건희 여사가 결심해야 결정"
일반의로 돌아오는 사직 전공의들…의료 정상화 신호 vs 기형적 구조 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