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TK 디스카운트

입력 2023-05-15 20:14:25

최경철 논설위원
최경철 논설위원

유통회사에 다니는 친구와 얼마 전 점심을 먹다가 "백화점 술이 동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7일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만찬을 할 때 식탁에 올려진 '경주법주 초특선'에 대한 관심이 폭발, 재고가 바닥났다는 것이었다. "쌀 표면을 79%까지 깎아내 깨끗하고 부드러우며, 우리 청주 가운데 최고로 손꼽히는 천년 고도의 명주"라는 대통령실 소개까지 있었으니 품절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초특선은 2010년 출시된 이후 대구경북(TK)에서는 최고로 정평이 나 있었지만 전국적으로는 지명도가 약했던 터라 초특선의 만찬주 채택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 금복주·경주법주 등의 지주회사인 금복홀딩스 김동구 회장에게 전화해 "대통령실에서 연락이 있었느냐"고 물어보니 "전혀 몰랐다"는 답이 돌아왔다. 대통령실이 다른 사항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품질만 보고 선택한 것이었다. 초특선의 79% 도정률은 사케 본고장 일본을 뛰어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김동구 회장은 "우리 연구소에서 땀을 흘린 결과물"이라며 연구원들에게 공을 돌렸다.

기자는 2003년 말, 희수(喜壽)를 맞아 1억 원의 성금을 역내 복지시설에 기탁했다는 얘기를 듣고 금복주 창업주 고(故) 김홍식 회장을 찾아갔다. 김홍식 회장은 "사람이 먹는 것이니만큼 첫째도, 둘째도 위생을 강조하며 품질을 키워 왔는데 그 덕을 봤다"고 했다. 전국적으로 무려 413곳이나 되던 주류회사가 1970년대 초반 10곳으로 통폐합됐는데 금복주가 그 안에 들어가면서 극적으로 살아남았다는 얘기를 하며 김 회장은 인정받지 못하는 기업은 살아남을 수 없다고 했다.

출시 13년 만에 늦깎이 조명을 받는 초특선을 보면 'TK 디스카운트(Discount)'가 떠오른다. 외국 정상을 대접할 만한 명주가 버젓이 있는데도 적잖은 지역 애주가들은 역외 대기업의 술을 찾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행동해 왔다. 지역 제품은 싸구려, 역외 대기업 생산품은 좋은 것이라는 이상한 문화였다. 2000년대 중반 화성산업이 기업 가치를 인정받아 유명 행동주의 펀드 투자 대상으로 편입됐을 때 이인중 당시 회장은 기자에게 "대구 기업들이 대구에 있다는 이유로 가치 평가 절하가 심한데 이를 개선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대구경북은 대기업 본사를 구경하기 힘든 곳이다. 섬유도시답게 제일모직, 코오롱이 대구에 있었고, 마이카 시대가 열리면서 대우그룹이 세계적 차부품 회사를 만들겠다며 대우기전을 대구 달성공단에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대구를 떠났거나 그룹 해체로 기업 규모가 쪼그라들었다. 구미에도 대기업 계열사들이 제법 큰 규모로 있었지만 외환위기 이후 외형이 축소됐다. 그러다 보니 대구경북 산업 현장은 절대다수가 중견·중소기업이다. 바뀐 기업 지형도에 대한 실망감이 나타나면서 지역 기업에 대한 지역민들의 폄하가 증폭돼 왔다는 게 여러 기업인들의 분석이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재무구조가 좋고 기술력 있는 탄탄한 TK 기업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소비재가 아닌 생산재가 다수를 차지하다 보니 홍보가 덜 됐고 이로 인해 지역민들이 잘 몰랐을 뿐이다. 지방정부가 지역 기업을 대우해 주고 기업을 알리는 노력에 동참해 지역민들과 기업의 거리를 좁혀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TK 디스카운트를 극복해야 지역 기업이 일어나고, 기업이 살아나야 TK에 미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