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과 전망] ‘과거사’ 잊진 말되, 미래 향한 결단 인정하자

입력 2023-05-09 18:30:00 수정 2023-05-09 19:38:25

이석수 서부지역본부장
이석수 서부지역본부장

민족 간의 유전적 거리를 연구한 자료에 의하면 한국인은 만주족 다음으로 일본인과 유전적으로 유사하다고 한다. 국가 유사성 지수도 한국은 일본과 가장 비슷하다. 두 나라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만큼 7세기 통일신라 이후부터 지금까지 항상 긴장 관계였다. 특히 근대 일본의 식민 지배에 따른 '과거사'는 한국인의 정서에 무거운 돌처럼 자리 잡고 있다. 사실 반일 감정은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정치적 프레임으로 활용하기에 아주 좋은 소재였다.

한일 관계 개선은 가해자였던 일본이 한국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일본 입장에선 먼저 머리를 숙일 만큼 한국이 아쉽지는 않다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였다. 뿌리 깊은 증오만큼 두 나라 국민들이 가지는 인식 차이도 분명히 존재한다. 일본은 그동안 1993년 고노 담화를 시작으로 1995년 무라야마 담화,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 2005년 고이즈미 담화 등 정부 차원의 사죄 성명이나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총리 친필 사과 친서 등으로 충분한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방일에서 아키히토 일왕이 일제강점기 한국 국민들의 고통에 대해 "통석(痛惜)의 념(念)을 금할 수 없다"는 발언도 비슷한 맥락이다. 당시 '뼈저리게 뉘우치는' 반성이 아니라고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반면에 일본은 체면을 위해 '사죄' 같은 직설 표현을 피하고 우회적 표현을 쓰는 고유의 체면 풍습이라고 설명한다.

국제정치학자인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동아시아에서 한미일 동맹이 구축돼 있지 않기 때문에 한일 관계를 개선하기 더 어렵다"면서 "그러나 중국의 위협이 커질수록 한국과 일본이 더욱 긴밀히 협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한쪽의 일방적인 양보를 통한 양국 관계 개선은 현실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낮다는 이야기다.

그러한 두 나라가 12년 만에 정상 간 '셔틀 외교'를 복원했다. 기시다 일본 총리가 한국을 방문, 지난 3월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정상회담을 했다. 현실적으로 북한의 핵 도발 위협과 중국의 부상 등 양국의 안보 협력이 매우 절실한 시점이다.

앞서 윤 대통령은 "과거사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으면 미래 협력을 위해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시다 총리도 "당시 혹독한 환경에서 많은 분이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셨다는 것에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강제 노역 노동자들이 겪은 고통에 대한 유감을 표명한 셈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관련, 한국 전문가들의 현장 시찰단 파견에 합의한 점도 우리의 건강과 안전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진일보한 조치다. 물론 셔틀 외교 한 번으로 해결이 어려운 민감한 사안들이 적지 않다. 진정성 있는 관계 개선을 위해 성의 있고 진솔한 태도를 지속해서 보여야 한다.

"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천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일본에는 과거를 직시하고 역사를 두렵게 여기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고, 한국은 일본의 변화된 모습을 올바르게 평가하면서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8년 일본 국회에서 한 연설이다. 한일 관계 발전은 결국 미래 세대를 위한 길이다. 국가 굴종 운운하며 '죽창가'만 부르짖어서는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