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4쌤의 리얼스쿨] 왕따, 어쩌면 깊어지는 시간

입력 2023-05-01 06:30:00

중학교 교사가 현장에서 바라본 '왕따'에 대한 고찰
자녀도, 자신도 왕따 경험 있어… 터널을 지나오며 생긴 '강인한 마음'

출처 클립아트코리아
출처 클립아트코리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수진이(가명)가 1학년 교무실 문을 빼꼼 열고 인사를 한다. 옆자리 앉은 작년 담임과 내가 같이 웃었다. 안 그래도 좀 전 시간에 수진이 얘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요즘 수진이가 잘 안 보이는 거 보니까 2학년 올라가서 적응을 잘하고 있나 보다, 라고.

인사를 한 수진이가 나한테 묻는다. "선생님, 그 책 다 읽었어요?" 두어 주 전에 나한테 책을 한 권 들고 와서 너무 재미있다고 읽어보라고 두고 갔는데, 내가 그 책을 읽었는지 궁금했나 보다. 수진이가 재미있다고 한 책은, '달러구트의 꿈 백화점'이다.

수진이는 사고가 자유분방한 아이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며칠 안 돼 자기 소개하는 시간에 자신이 짜고 있는 털실 꾸러미를 들고 와 보여주며 자연스러운 입말로 떨지도 않고 자신을 소개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아이가 친구들로부터 배척당한다는 느낌이 들었고 알고 보니 초등학교 때부터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수진이의 배를 발로 차고도 미안해하지 않고 계속 힘들게 하는 남학생이 같은 반이었다. 수진이는 같은 초등학교 출신들에겐 '같이 놀면 안 되는 아이'였고 그게 다른 초등학교 출신들에게로 퍼져나가 점점 더 위축됐다. 교실에 있기가 힘들어 보건실이나 상담실에 가 있을 때가 잦아졌고 수진이의 큰 눈이 눈물에 젖어 있을 때도 많았다. 그걸 바로잡느라 지도하는 담임교사는 어느새 수진이 편만 드는 사람이 되고, 반에서 목소리 큰 아이들이 담임과 적대하다 보니 반 분위기가 나빠졌다. 있는 그대로 상대를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교사의 자녀도 '왕따'가 될 수 있다

올해 우리 반에도 작년 한 해 관계 문제로 힘들었던 여학생이 입학했다. 이 아이가 반장 선거에 나와 당선됐는데, 그 과정에 어떤 남학생의 말투에서 싫어하는 낌새가 느껴졌다. 살짝 불러 물어보니 둘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여러 아이가 얽혀 있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했는데, 우리 둘이 나눈 얘기가 돌고 돌아 그날 저녁 그 남자아이의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 어머니는 상대 어머니가 이미 담임인 나한테 얘기를 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그때 일을 설명하고 싶어 했다.

작년 옆 반에서 일어난 수진이 일이 떠오르며 학년 초부터 잘 조율해 나가지 않으면 사태가 심각해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밀려왔다. 게다가 아이들끼리만의 문제라면 학교에서 어떻게 지도해 보겠지만, 어머니들끼리도 감정적으로 불편한 상태라 마음이 무거웠다. 이 일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 줄곧 고민하며 '왕따'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몇 년 전 내 아이도 중학교 때 왕따를 경험했다. 학년 초 친했던 아이와 멀어지면서 자기한테는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고 점심을 먹으러 가지 못했다. 남들 밥 먹을 동안 혼자 화장실 가서 울다 나오곤 했다. 여중생들에게 학교에서 혼자 숨을 수 있는 유일한 비상구가 화장실이란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괴롭힘은 계속됐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내 아이를 토닥거려 주는 것뿐이었다.

당시 나도 내 아이와 동갑인 여학생반의 담임이자 학년 부장이기도 해 학년에 이런 문제가 생기면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봐온 남을 괴롭히는 아이들은, 무언가 내면의 힘겨움이 있는 아이들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강해 보이는 그 아이들이 사실은 약해서, 힘들어서 그런 식으로 표출할 때가 많았다. 밤마다 우는 내 아이도 애처롭지만, 엄마보다 교사로 더 오래 살아온 내겐 만난 적 없는 그 아이도 잘 자라야 하는 안타까운 아이였다.

◆미래에 교사가 될 학생도 '왕따'가 될 수 있다

돌아보면 나도 고등학교 다닐 때 왕따 경험이 있다. 1990년대 초반이던 그때는 왕따라는 말이 없어서 내가 왕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뿐,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면 당시 내 상황이 왕따였다. '죽음으로써 나의 결백을 증명해 보일까?' 이렇게까지 생각했던 걸 보면. 그런데 그때도 긴 시간이 흐르자, 아이들은 내가 선생님께 무언가를 일러바치는 이상한 애가 아니란 걸, 자신들이 오해했음을 인정했다.

잊고 살다가, 딸아이가 그런 상황에 빠지자, 나의 과거까지 끌어내 아이를 위로했다. 엄마가 겪어보니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망가지지 않고 자신을 잘 지켜나가면 진 게 아니더라고.

사실 그 순간엔 나도 어떻게 풀려갈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서 그렇게 그 시간을 함께 견뎌냈는데, 아이는 그 터널을 무사히 통과했다. 게다가 자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자신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아이라는 믿음이.

언젠가 딸아이가 혼자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길래 무슨 행복한 일이 있는지 물었다.

"엄마, 행복은 0에 수렴하는 거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게 행복이야."

오늘 수진이가 빌려준 '달러구트의 꿈 백화점'을 다 읽었다. 군대에 다시 가는 꿈, 시험을 치는 꿈 같은 악몽을 꾸고 꿈을 환불하러 몰려온 사람에게 '꿈 백화점'의 주인 달러구트는 말한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은, 거꾸로 생각하면 온 힘을 다해 어려움을 헤쳐 나가던 때일지도 모르죠. 이미 지나온 이상,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랍니다. 그런 시간을 지나 이렇게 건재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손님들께서 강하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교실전달자(중학교 교사, 배꽃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