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간 매주 한차례 할머니 그림학교 운영
평균 연령 80세…20여 차례 전시회도
"학교 다닐 땐 그렇게 미술이나 음악시간을 싫어했는데, 인쟈는 집에서도 달력 찢어가 뒤에다 색연필로 마을 풍경 그립니더. 미술이 이렇게 쉽고 재밌는 건지 몰랐네예."
점토로 만든 커피잔과 접시에 물감으로 꽃을 그리던 김순교(80) 할머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김 할머니는 "매주 그림학교 수업이 기다려진다. 여기에 와서 같이 얘기 나누고 웃다보면 삶에 대한 걱정을 잊는다"고 했다.
매주 수요일 경북 예천군 지보면 신풍리의 신풍미술관에서는 특별한 수업이 열린다. 2010년부터 14년간 이어져온 '할머니 그림학교'가 그것.
미술교사, 큐레이터로 재직했던 이성은 관장은 시어머니를 모시고자 2009년 이곳으로 귀향하면서 미술관을 지었다. 그러다 동네에 살던 한 할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얘기를 듣고, 미술 수업을 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문화예술은 분명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있다. 어둡고 우울했던 마을 분위기가 밝게 바뀐 것만 봐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19일 오전 10시 신풍미술관의 교육실에서는 15명의 할머니가 붓을 들고 색칠에 한창이었다. 조안나 학예팀장은 "지난 수업에서 점토로 그릇과 수저, 반찬 등을 만든 데 이어 색을 칠하는 시간"이라며 "선생님들은 수업 진행만 도울 뿐, 절대 선 하나도 터치하지 않는다. 오로지 할머니들의 손길로만 완성되는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들"이라고 했다.
할머니들의 작품에는 삶이 녹아있다. 오순화(78) 할머니의 밥상에는 수저와 밥그릇, 컵이 두 개씩 놓였다. 소복히 담긴 고봉밥과 고등어구이, 배추잎, 두부구이 등 푸짐한 반찬들에 색이 입혀졌다. 오 할머니는 "남편과 같이 먹을 밥상을 예쁘게 차려봤다"며 "수업한 지 3년째인데, 이곳에 오면 친구들을 만나 즐겁게 얘기도 하고 마음이 편안해서 참 좋다"고 했다.
2시간 가량의 수업이 끝나면 전시장 옆의 식당에서 밥 냄새가 솔솔 풍겨져온다. '갤러리 새댁'이라 불리는 이 관장은 매주 할머니들을 위해 점심 식사를 직접 준비한다.
그는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해온 할머니들이 이날 하루만큼은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고, 대접받길 바라는 마음"이라며 "평균 연세가 80세다. 오늘 오신 분이 다음주에는 못 오시는 경우도 있었다. 항상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한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은 단순히 수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엿한 작가로서 전시도 여러차례 열었다. 2010년 7월 신풍미술관에서 열린 '할매가 그릿니껴?' 전시회를 시작으로 20여 차례 작품을 전시했으며, 2018년에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전시 초청을 받아 4명의 할머니가 직접 작품을 들고 전시장을 찾기도 했다.
이 관장은 "할머니들은 세월 속 상처를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그래도 그 때가 좋았다'며 다시 좋은 기억으로 바꿔나가기도 한다"며 "노년기 우울증 예방, 치유를 넘어 자존감을 회복하는 등 긍정적인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이어 "가끔 영화나 전시를 보러가고, 수학여행을 떠나는 등 다양한 추억도 쌓아가고 있다. 할머니들이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계속 보기 위해 힘이 닿을 때까지 할머니 그림학교를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신풍미술관은 할머니 그림학교 외에도 치유농장인 '신풍아트팜' 등을 운영하고 있다. 전시장에서는 김정태 작가의 전시 '작은 밥상'이 5월 13일까지 열린다. 또한 5월부터는 다양한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드로잉 카페와 체험 프로그램을 늘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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