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 할머니가 매일 도서관 가는 이유?…원고개 도서관 '책 읽어주기 봉사' 화제

입력 2023-04-14 10:22:20 수정 2023-04-16 17:47:15

매일 오후 2시면 출석 도장…특별한 그림책 읽기 봉사 프로그램 '책 읽어주세요' 때문
지난 8월부터 하루 1시간 진행…
외로운 홀몸 노인, 도서관서 큰 위로

자원봉사자 이창순(54) 씨가 김갑연(90) 할머니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배주현 기자
자원봉사자 이창순(54) 씨가 김갑연(90) 할머니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배주현 기자

"아 모시? 난 무시(무의 경상도 방언)라 카는 줄 알았잖아."

11일 오후 2시 대구 서구 원고개 도서관 1층 어린이‧유아 열람실. 의자에 앉은 김갑연(90) 할머니가 크게 웃었다. 옆에는 노란색 앞치마를 두른 이창순(54) 씨가 앉았다. 둘은 '섭순'이라는 동화책을 함께 나눠보고 있었고, 마침 그림책 첫 표지에 모시 옷을 입고 있는 여성 그림이 나오자, 이 씨는 김 할머니에게 "와~ 모시 입고 있다, 엄마도 모시 알제"라고 말을 건넸다.

모시를 무시로 알아들은 게 김 할머니에겐 꽤나 큰 웃음포인트였다. 한바탕 웃은 둘은 다시 그림책에 집중했다. 이 씨는 그림책을 차근차근 읽어나갔고 김 할머니는 어느새 그림책에 무섭도록 집중했다.

김 할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오후 2시가 되면 원고개 도서관에 출석도장을 찍고 있다. 이곳에만 있는 특별한 그림책 읽기 봉사 프로그램인 '책 읽어주세요' 때문이다.

원고개 도서관이 지역 어르신을 위해 시행하고 있는 책 읽어주는 봉사가 화제다.

'책 읽어주기'는 도서관에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앞마당에서만 앉아있던 어르신들의 모습에서 시작됐다. 원고개 도서관 앞마당은 지역 어르신들의 휴식처였다. 도서관 직원들은 "들어와서 쉬어라" 권했지만, 어르신들은 손사래 치기 바빴다.

오영선 원고개 도서관 사서는 "나이도 많고 글도 모르는 어르신들이 도서관 문턱을 넘기란 쉽지 않았다. 도서관 안에 들어오라고 해도 책도 못 읽는데 가서 뭐하냐는 반응이었다"며 "그럼 '저희가 책을 읽어드릴게요'라고 직원들이 이야기하면서 어르신을 도서관 안으로 모실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지난해 8월부터 시작된 책 읽어주기 봉사에 먼저 직원들이 나섰다. 이들은 시간을 쪼개 책 읽기에 나섰지만 기존 업무까지 처리해야 하면서 어려움이 컸다. 이에 올해부터는 본격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 6, 7명의 자원봉사자는 노란 앞치마를 입고 매일 오후 1시30분부터 2시30분까지 도서관 1층에서 어르신을 기다린다.

자원봉사자 옆에 나란히 앉아 책을 보는 행복이 컸기 때문일까. 어르신들의 반응은 뜨겁다. 90세의 나이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도서관을 찾는 김갑연 할머니 외에도 오후 1시 30분 이후부터 어르신들이 수시로 자원봉사자 곁을 오간다.

또 다른 자원봉사자가 어르신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배주현 기자
또 다른 자원봉사자가 어르신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배주현 기자

무엇보다 젊은 남성 봉사자는 어르신 사이에서 인기 스타다. 손자가 옆에서 말동무가 돼 주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도서관을 찾는 어르신은 대부분 홀몸 노인으로 집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그들에게 하루 1시간의 봉사자와의 만남은 또 다른 위로가 되는 셈이다.

김갑연 할머니는 "그냥 좋다. 나랑 이야기해주는 것도 좋고 다 좋다. 어떤 사람들은 책 읽어주는 게 지겹다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하루도 안 빼먹고 나온다"고 말했다.

그런 어르신의 사정을 잘 아는지 하루에 기본 4, 5권의 그림책을 읽는 자원봉사자들은 목이 아픈지도 모르고 책 읽기와 더불어 일상대화도 섞어가며 적극 말동무가 된다. 10개월째 이어온 책 읽어주기에 어느덧 어르신들에게 읽지 않은 그림책이 없다.

자원봉사자 이창순(54) 씨는 "어르신들이 매일 집에서 무엇 하겠느냐. 홀로 말없이 텔레비전만 보고 말 한마디 안할텐데…. 우리 친엄마와 비슷한 또래라 어르신을 보면 모두 내 부모님 같다"며 "오늘 뭐 먹었는지, 오늘 읽은 책 중 뭐가 가장 재밌었는지 등 좋은 말동무가 돼 주고 싶어 이것저것 많이 물어본다. 나 역시 즐겁다"고 했다.

손귀숙 원고개 도서관장은 "'이건 이미 읽었는데'라고 말하는 어르신이 많다. 그 만큼 어르신들의 기억력이 상당하다. 어르신들은 그림을 보는 걸 좋아하기에 그림책을 읽어줘야 하는데, 하루에 4~5권씩 읽다보니 어느덧 읽을 책도 동났다"며 "도서관 상호대차 서비스도 알아보면서 열심히 어르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