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방어선 전투 "반전에 반전 거듭…끝내 지켜내고 인천상륙작전·북진 발판 마련"

입력 2023-03-28 06:30:00

[정전 70주년] ⑥낙동강 방어선 전투(하)
9월 5일 하루 동안 미군 1,245명 손실 최대 악몽의 날
북한군 제15사단 전광석화로 영천 점령 다시 맞은 위기
적, 하양-대구로 진출하면 미8군 방어선 연쇄붕괴 우려
9월 영천전투 8월 다부동전투 같은 낙동강 방어전 분수령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관에 재현한 상륙 당시 모습. 빗발치는 적의 포탄 속에 좌초된 문산호에서 학도병들이 밧줄에 의지한 채 뭍으로 상륙하고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관에 재현한 상륙 당시 모습. 빗발치는 적의 포탄 속에 좌초된 문산호에서 학도병들이 밧줄에 의지한 채 뭍으로 상륙하고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북한군 9월 공세의 목표는 Y선(왜관-다부동-영천-기계-포항)이었다. 이를 위해 8월 31일 X선(왜관-남지-마산)의 마산 정면을 먼저 때렸다. 국군과 유엔군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자 북한군 제2군단은 9월 2일 왜관·다부동, 신령·영천, 안강·포항에서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다.

낙동강 방어선의 붕괴 위기가 또 다시 닥쳤다. 유엔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였고 격렬했다. 이때 북한군 작전방침은 "낙동강 일대에 압축된 국군과 유엔군을 두 개의 강력한 타격집단으로 대구 및 영천 일대에서 포위·소멸하여 최종목표인 부산을 점령한다"였다. 김일성도 8월 22일에 전선사령부를 방문해 '공세준비에 총력을 경주할 것'을 독전했다. 북한군은 9월 중순까지 공세를 계속했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끝내 방어선을 지켜내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의 발판을 마련했다.

1950년 9월 초 낙동강 방어선 전선 상황. 임시수도가 부산으로 옮겨졌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제공
1950년 9월 초 낙동강 방어선 전선 상황. 임시수도가 부산으로 옮겨졌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제공

◆하루 동안 미군 1,245명 손실 악몽의 날

왜관·다부동은 미 제1기병사단이 국군 제1사단으로부터 방어지역을 인수받아 대구 방어를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북한군 제1·3·13사단 등 3개 사단 역시 대구 점령을 위해 총공세를 감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아 모두가 운명의 전투를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수암산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8월 공세 때와 비슷했다. 8월에는 국군 제1사단이 17일 동안의 혈전으로 방어진지를 지켜냈지만, 화력과 기동장비에 의존하는 미군은 단 3일 만에 진지를 북한군에게 내어 주고 4㎞ 후방으로 철수했다. 이제 대구까지 거리는 불과 10㎞였다.

미 제8군에게 9월 5일은 악몽의 날이었다. 이날 하루 미군은 전사 및 행방불명 724명, 전상 521명 등 1천245명의 인원 손실이 발생했다. 제8군사령부는 낙동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데이비드슨 선'으로 철수할 것을 검토했다.

그러나 낙동강 방어선 포기는 인천상륙작전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우려가 있었다. 제8군사령부는 어떠한 수단을 강구하더라도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야만 했다. 주 지휘소와 육군본부를 부산으로 이동시키고 대구에는 전방지휘소만 운용했다.

북한군 공격도 그때쯤 한계에 다다랐다. 유엔 공군의 폭격으로 보급 및 병력 부족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집요한 공격을 감행하던 북한군 공격이 12일 무렵 시들해지면서 대구는 지켜졌다.

영천지구 전투를 기념해 1980년 영천시 마현산 정상에 건립된 영천지구 전적비. 강선일 기자
영천지구 전투를 기념해 1980년 영천시 마현산 정상에 건립된 영천지구 전적비. 강선일 기자

◆영천 함락, 낙동강 전선 전체 위기 봉착

9월 들면서 북한군은 다부동을 통한 대구 정면보다는 오히려 영천 돌파에 더 치중했다. 당시 영천에는 국군 제2군단의 제6사단과 제1군단의 제8사단이 북한군 제2군단의 2개 사단(제8·15사단)과 대치했다.

2일 밤 북한군 제8사단이 영천 서북쪽의 신녕 일대에서 국군 제6사단을 공격하고 북한군 제15사단은 보현산 일대에서 국군 제8사단을 공격했다. 전세가 불리해진 국군 제8사단은 다음 날 기룡산 일대로 철수했다.

이 무렵 국군 제8사단 방어선 오른쪽인 운주산 일대는 수도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을 받아 남쪽으로 철수하게 되자, 국군 제8사단의 오른쪽에 약 14㎞의 간격이 형성되었다.

이때 북한군 김무정 제2군단장은 "제12사단은 안강을 돌파했는데 제15사단은 왜 영천을 돌파하지 못하느냐"고 질책하면서 박성철 제15사단장을 해임하고 조광렬 소장으로 교체했다. 박성철 소장이 지휘한 북한군 제15사단은 개전 이래 동락리와 화령장에서 연거푸 국군에게 참패를 당한 부대다.

사단장이 교체된 북한군 제15사단은 국군 제8사단 오른쪽에 형성된 14㎞의 간격을 이용해 아무런 저항 없이 전선 후방으로 침투했다. 이어서 제15사단은 5일 오전 1시쯤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국군 제8사단을 기습했고, 다음 날 새벽 영천을 점령했다. 전광석화였다.

영천은 중앙선과 동해남부선 철도, 대구(34㎞), 포항(40㎞), 경주(28㎞) 등으로 통하는 전략적 교통의 요충지였다. 북한군의 영천 장악은 아군의 중·동부전선 양단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낙동강 전선 전체가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영천을 점령한 북한군 제15사단의 예상 진출로는 대구로 진출해 제8군사령부 후방을 차단하거나 경주로 진출해 부산으로 직행하는 것이었다.

북한군이 어느 방향으로 진출하든 유엔군 입장에서는 위기였으나 제15사단이 경주-부산 방향으로 진출할 경우에 유엔군은 다소의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군이 하양-대구 방향으로 진출한다면 대구가 포위돼 제8군의 방어선이 연쇄적으로 붕괴될 위험이 있었다.

다부동 가산산성 전투 현장에서 발굴된 국군 유해. 전사한 모습 그대로 호국영령이 됐다. 이인욱 자유총연맹 칠곡지회장 제공
다부동 가산산성 전투 현장에서 발굴된 국군 유해. 전사한 모습 그대로 호국영령이 됐다. 이인욱 자유총연맹 칠곡지회장 제공

◆북한군의 패착에서 이끌어낸 승리

국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의 경계지점인 영천이 돌파되자, 육군본부는 제1군단 소속의 제8사단을 제2군단으로 전환해 영천 일대의 지휘체제를 정비했다. 위기에 직면한 유재흥 제2군단장은 예하의 백선엽 제1사단장과 김종오 제6사단장을 소집해 각 사단이 1개 연대씩 차출해 영천으로 증원하도록 했다. 당시 제1사단과 제6사단도 방어에 급급한 상황이었으나 대안이 없었다. 결국 제1사단 제11연대, 제6사단 제19연대가 영천 지역으로 급파돼 북한군의 대구 진출에 대비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북한군 제15사단은 대구가 아닌 경주 방향으로 진출했다. 때마침 국군 제8사단 제21연대는 적 후방에 고립된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영천 북방의 견부진지(전방 및 측후방을 통제할 수 있고 적의 진출에 있어서 반드시 확보돼야 하는 요충지)를 고수하면서 돌파구 확대를 막고 있었다. 제6사단도 북한군 제8사단의 공격을 계속 격퇴시키고 있었다.

그러자 김무정 북한군 제2군단장은 이번에는 북한군 제8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제8사단이 신녕을 돌파하지 못해 영천을 점령한 제15사단의 우측면이 노출되고 있다"고 질책했다. 그러나 국군 제6사단은 끝내 북한군 제8사단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에 따라 상황은 오히려 후방 깊숙이 침투한 북한군 제15사단이 국군에 의해 포위된 상황으로 바뀌었다. 반격태세를 가다듬은 국군 제2군단은 제8사단과 신편된 제7사단을 투입해 9월 8일 오후 영천을 탈환했다.

9월 공세 당시 영천지역 전투는 8월 공세의 칠곡 다부동 전투와 함께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낙동강 방어전의 분수령이었다. 8월 초에 낙동강 선까지 진격한 북한군은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한다는 목표 아래 총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은 견고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치고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한신협·매일신문=이영욱 기자 hello@imaeil.com

다부동 전투가 벌어지는 어느 고지로 노무자들이 지게로 군수물자를 나르고 있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제공
다부동 전투가 벌어지는 어느 고지로 노무자들이 지게로 군수물자를 나르고 있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