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식 훈련 최강 육군 아테네 무적함대에 승리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장안의 화제다. 유럽 출장길 한동훈 법무장관이 이 책을 들고 공항에 나타나면서다. 일거수일투족 언론의 주목을 받는 한 장관이 손에 쥔 책 내용은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 전쟁이다. 저자 투키디데스는 비록 아테네 출신이지만, 아테네에서 도편추방당해 20여년 간 조국을 떠나 있으면서 이 책을 썼다.
냉정한 시각으로 엄정한 사료 선택과 객관 서술이 가능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20여년 앞서 B.C430년경 쓰여진 헤로도투스의 『역사』와 함께 인류사 역사 서술의 비조이자 모범으로 손꼽히는 이유다. 고대 그리스민족은 단일 국가를 만든 적이 없다. 수 백개의 폴리스(Polis)로 나뉘어 전쟁과 협력을 반복했다.
여기에 동방의 강대 제국 페르시아까지 포함해 전쟁과 평화의 서사시를 썼다. 2천 5백여년전 스파르타와 아테네 양강의 충돌은 미중 갈등과 닮은꼴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모색
하는 그리스 폴리스들과 현대 많은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타산지석인 이유다.
◆아테네, 페르시아 전쟁 승리
아테네에서 차를 타고 1시간여 북서쪽으로 달리면 폐허로 변한 유적지가 나온다. 플라타이아이(Plataiai). 8월에 찾아본 플라타이아이는 밀수확이 끝난 뒤 누런 이삭들만 나뒹굴며 황량했다. 잔해 너머로 바라보이는 벌판에서 B.C479년 8월, 그리스민족과 페르시아 제국의 운명이 걸린 전투가 펼쳐졌다. 플라타이아이 전투. 10만여 명의 페르시아군과 8만여 명의 그리스 연합군이 맞붙어 그리스 연합군이 대승을 거뒀다.
그리스 연합군이 1만여명 사망할 때, 페르시아군은 최소 5만명 이상 죽으며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페르시아는 이후 그리스 정복의 꿈을 접었다. B.C490년 1차 페르시아 전쟁때 마라톤 전투, B.C480년 2차 페르시아 전쟁 때 스파르타 레오니다스 왕과 300명 결사대의 테르모필레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 B.C479년 플라타이아이 전투 승리 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며 그리스 문명권의 새로운 맹주로 떠올랐다.
◆아테네, 델로스 동맹으로 번영
전 세계 그리스 애호가들의 로망 미코노스 섬은 에게해의 진주라 불릴 만 하다. 흰 건물과 풍차, 푸른 바다가 어울어진 미코노스 항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섬 하나가 보인다. 델로스다. 그리스 신화 태양신 아폴론과 쌍둥이 누나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태어난 성스러운 섬. 4월 말에 찾은 델로스는 울긋불긋 아네모네 꽃으로 뒤덮인 낭만적인 모습이었다.
지금은 무인도지만 당시는 무역항으로 번성했던 델로스에 B.C478년 아테네 주도로 그리스 도시국가 대표들이 모였다. 주로 에게해와 터키 서부 연안 이오니아 지방 도시국가였다. 페르시아 침략에 취약한 나라들이다. 페르시아 침략에 대응하고자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고, 매년 기금을 모아 델로스에 보관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평가받는 페리클레스는 기금을 탐내 B.C454년 기금창고를 델로스에서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으로 옮겼다. 아테네는 사금고처럼 돈을 빼 쓰며 크게 번영했다. 광에서 인심 나고, 배불러 등 따뜻하면 문화예술이 꽃피는 법. 정치, 학문, 문학, 예술 전반에서 서양 문명, 나아가 지구촌 문명의 원형을 빚어냈다.
◆경제 패권 다툼,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배경
전통의 육군 최강 스파르타의 눈에 아테네가 고울 리 없었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에 자리한다. B.C550년대부터 펠로폰네소스 반도 안에 있던 여러 폴리스들과 차례로 동맹을 맺어 스파르타 주도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만들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맹주인 헤게몬(Hegemon) 스파르타와 델로스 동맹의 아테네 사이 충돌은 불가피했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계기를 B.C433년 케르키라(코르푸섬)와 코린토스 사이 전쟁에서 찾았다. 코린토스는 국내 성경 번역에서 고린도라고 부르는 도시다.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가느다란 목에 위치해 에게해와 아드리아해를 양쪽으로 접한다. 일찍부터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비결이다. 신흥 무역 강국으로 등장해 고깝던 아테네가 케르키라 편을 들자 빈정이 상했다.
이 무렵 아테네 서쪽에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메가라는 아테네의 무역제재 조치로 앙심을 품고 있었다. 코린토스와 메가라는 아테네에 불만을 품던 다른 도시국가들과 연합해 B.C432년 펠로폰네소스 동맹회의 개최를 스파르타에 요구하며 전쟁에 나서라고 다그쳤다.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모스는 전쟁에 부담을 느꼈다.
B.C446년 아테네와 '30년 평화조약'을 체결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파르타 의회가 전쟁 결정을 내리자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나선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졌다.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BC 404)의 전말
그리스 수도 아테네 시가지는 조금의 인내심만 가지면 주요 유적과 박물관을 걸어다닐 수 있다.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 동쪽에 붙은 그리스 비문 박물관(Epigraphic Meseum)도 마찬가지다. 중국 서안의 비림(碑林) 박물관과 비슷하면서도 더 압도적이다.
서안 비림박물관은 후한 시대 그러니까 2세기 이후 비석을 전시중인데 비해 아테네 비문박물관은 B.C8세기 그리스 문자가 등장하던 시기 비문부터 전시중이니 시기적으로 1천여년을 앞선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국들에게 분담금을 높여 받는 내용,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숨진 아테네 시민병사 명단…. 2천500여년 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실상이 실시간으로 펼쳐진다.
전쟁 초기 10년을 아르키다모스 전쟁(B.C431-B.C421)이라고 부른다.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모스가 육군을 동원해 아테네를 공격하면 아테네가 농성전으로 버티면서 우세한 해군을 활용해 바다에서 공략하는 전법을 섰다. 아테네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초기에 세운 전략이었다. 교착상태이던 전쟁은 B.C 421년 니키아스 협약으로 10년 만에 평화로 갈무리 되는 듯 했다.
하지만, B.C 415년 아테네가 전쟁론자 알키비아데스의 선동에 따라 시칠리아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재개됐다. 전쟁은 B.C413년 아테네의 참패로 끝났다. 아테네는 대혼란에 빠졌고, B.C411년 프리니쿠스 주도 쿠데타로 민주체제마저 전복됐다. 다행히 트라시불로스 장군의 진압으로 민주정을 되찾고 군대를 재건하지만, 아테네는 B.C404년 스파르타에 최종적으로 패배한다.
◆투키디데스 함정과 전쟁의 교훈
아테네에 무혈입성한 스파르타군은 아테네에 가혹한 짐을 지운다. 지중해 최강 아테네 함대는 스파르타 손으로 넘어갔다. 스파르타 육군의 공격 때 버틸 수 있던 비결인 아테네 보호 성벽이 헐렸다. 아테네 제국주의의 정치적 밑바탕이자 경제 번영의 디딤돌이던 델로스 동맹도 해산됐다. 더욱 굴욕적이었던 스파르타의 요구는 아테네 민주주의 해체다.
민주정치가 붕괴되고 '30인 독재정치'가 등장했다. 다행히 트라시불로스 장군이 B.C411년에 이어 '30인 독재정치' 체제를 뒤엎고 민주정치를 회복시켰다. 하지만, 이미 아테네는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서산에 지는 해였다. 승자인 스파르타 역시 뛰어난 군사력과 달리, 외교 안목 부족과 통솔력 부족으로 결국 패권을 놓치고 만다.
투키디데스가 B.C411년까지만 다룬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투키디데스 함정'이란 용어가 생겼다. 기존 패권국과 신흥 강국이 결국 충돌한다는 통찰이다. 20세기 말 소련 해체로 1강을 구축한 미국 패권에 21세기 중국이 도전중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보면 영원한 강자도 승자도 없이 언제든 위기를 맞는다. 하물며 강자들 틈바구니에 낀 약소국은 고도의 정세판단 능력과 실용적 외교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생존하기 어렵다. 탁상 이념이 끼어들 여지는 좁다.
역사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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