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기록여행] 열중 아홉은 서울의 대학 희망

입력 2023-03-02 14:25:00 수정 2023-03-02 20:55:42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4월 1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4월 1일 자

'~그중 대학으로 진학할 희망자 수는 총수의 80% 이상인 610여 명이나 되는데 결국 나머지 수십 명이 사회에 나서는 셈이다. 경제고와 생활난이란 소리가 귀가 아프도록 듣고 있는 현상에서 생각할 때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없다. 지식에 의욕이 고도로 발휘되는 것을 반영함인지 하여 반가운 현상임에는 틀림없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4월 1일 자)

백성들은 해방된 나라라고 세상 이치가 달라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듯한 직업이 있어야 돈을 벌고 잘 살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려면 아무리 곤궁해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 부모들의 믿음이었다. 부모들의 이런 생각은 자식들의 상급학교 진학으로 나타났다. 초등학교서 시작된 중학교의 입시 전쟁은 대학 진학 열기로 이어졌다.

1950년 대구지역 9개 남자 중학교의 졸업생은 750여 명이었다. 영남중과 대건중 등 2개 학교는 졸업생이 없었다. 그 가운데 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은 80%가 넘는 610명으로 조사됐다. 계성중의 경우 졸업생 82명 중 단 한 명도 취직 희망자가 없었다. 실제로 대학에 가는 학생은 이보다는 작았다. 학생들은 대학 진학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수치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무작정 대학 진학으로 의사를 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학생이 원하는 희망 대학은 서울이 압도적이었다. 열중 아홉은 1차 지망 학교로 서울의 대학을 꼽았다. 학생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을 원하는 이유는 간명했다. 수업의 질이 지방에 비해 높고 전통이 있어 장차 자신의 미래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학생 대부분이 서울의 대학으로 가려고 하자 이를 걱정하는 소리가 나왔지만 이내 묻혔다. 졸업생 중에는 해사와 육사 등에 진학해 군인이 되려는 학생도 20명 정도 되었다.

대학의 지원 학과 인기는 대체로 그 시대의 바로미터였다. 당시 학생들은 법과 지원을 첫손에 꼽았다. 1949년에 사법과 행정 공무원을 뽑는 고등고시령이 제정된 데서 보듯 제도의 변화와 맞닿아 있었다. 이듬해 실시된 고등고시의 합격은 곧바로 성공의 문을 통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말하자면 출세의 지름길로 인식했다. 학생들이 고시로 몰리자 국가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비판의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영문과와 상과에 이어 국문과, 공과 순으로 지원했다. 의과는 지금과 달리 학생들의 지원 비율이 가장 낮았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4월 1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4월 1일 자

'~지원자의 학과를 보면 영문을 배워서 외국 바람이라도 쐬어보려는 사람이 제일 많은 편이며 다음이 가사를 전공하여 주부도를 닦으려는 사람 여교사님이 되려는 사람 그리고 법관이 되려는 사람 물리학 과학을 전공하려는 사람도 23명이 끼어 있다 하니 반가운 현상이다.' (남선경제신문 1950년 4월 1일 자)

여학생들은 어땠을까. 그해 대구의 졸업생 배출은 5개의 여중 가운데 단 두 학교에 불과했다. 경북 여중 55명과 신명여중 18명 등 모두 73명이었다. 두 학교의 대학 지원자는 경북여중 36명, 신명여중 8명으로 조사됐다. 여학생들 또한 남학생처럼 대학 지원을 원했다. 하지만 부모들은 여학생의 대학 진학을 꺼렸다. 졸업 때 여학생들은 대개 20살에서 23살로 남학생보다 나이가 많았다. 애초 남학생보다 입학이 늦은데 원인이 있었다. 부모들은 대학 4년을 다니면 나이가 너무 많아 혼기를 놓칠 수 있다는 걱정을 했다.

여학생들은 희망 학과가 남학생들과는 달랐다. 영문과 등 외국어 관련학과를 선호하는 비율이 높았다. 외국어를 배워두면 직업을 찾기가 쉬울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됐다. 게다가 국내의 답답함을 벗어나 바다 건너 이국에서 공부를 해보려는 욕구도 작용했다. 이와는 달리 대학에서 가사를 전공해 현모양처의 길을 걷겠다는 학생도 있었다. 물리학 등을 전공해 과학자가 되겠는 대답도 나왔다. 남학생의 숫자에는 훨씬 미치지 못해도 법과를 전공해 고시에 도전하려는 여학생도 눈에 띄었다.

대학 진학을 하지 않거나 농업이나 상업 등 실업계 졸업생은 취직으로 발길을 돌렸다. 공개시험이 많지 않은 시절이라 이력서를 쓰고 취직을 부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학생은 은행원이나 초등학교 교사를 선호했다. 교사는 봉급은 많지 않아도 안정적인 직업으로 여겼다. 졸업하자마자 결혼하는 여학생도 더러 있었다. 당시의 중학교는 6년제였다. 졸업하면 대학 진학이 가능했다. 1951년이 지나 지금의 중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일찍이 중학교의 수용인원이 적어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입시 전쟁을 치렀다. 어렵사리 입학한 중학을 졸업해도 원하는 대학에 다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 뒤로 대학의 문은 차츰 넓어져 이제는 되레 지원자 규모를 넘어섰다. 그렇지만 서울로 향하는 대학 입시생들의 긴 줄은 여전히 끝날 조짐이 없다. 그 시작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박창원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초빙교수
박창원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초빙교수

박창원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