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뜰리에 in 대구] 박휘봉 작가 “스스로 한계 벗어나려는 노력…계속 고민하고 변화”

입력 2023-02-21 09:54:01 수정 2023-02-22 17:43:43

여든 넘은 나이에도 폐철근 일일이 손으로 구부리고 펴 작업
“모두 다르게 생긴 선, 율동성과 질서 동시에 갖고 있어”
“재미가 작업의 원동력…아직 하고 싶은 얘기 많아”

박휘봉 작가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웃음지어보이고 있다. 그의 뒤로 작업에 쓰이는 다양한 공구들이 보인다. 이연정 기자
박휘봉 작가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웃음지어보이고 있다. 그의 뒤로 작업에 쓰이는 다양한 공구들이 보인다. 이연정 기자

성주에 자리한 박휘봉 작가의 작업실. 이연정 기자
성주에 자리한 박휘봉 작가의 작업실. 이연정 기자

"달성군 남평 문씨 본리세거지 수백당에 걸린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 '쾌활(快闊)'이 내 마음 속 깊이 박혀있습니다. 쾌활은 곧 스스럼 없는 마음씨를 뜻합니다. 내 성질과도 비슷하고, 자기 주장이 뚜렷한 현대미술의 이념과도 의미가 통하죠. 쾌활, 얼마나 좋습니까."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성주 선원리의 언덕배기, 그의 작업실이 있다. 마당에 놓인 다양한 작품과 철근 재료들이 누가 봐도 '예술가의 작업공간'임을 알게 한다. 박휘봉(82) 작가는 작업실에 놓아둘 선반을 만들고 있었다면서, 용접 마스크를 벗으며 쾌활하게 기자를 맞았다.

- 박달예술촌 작업실 화재라는 아픈 경험 이후, 새 작업실에서의 시간이 벌써 10년이 다돼간다. 이곳은 어떤 공간인지.

▶2012년, 달성군 다사읍 박달예술촌에 있던 내 작업실에 전기 누전으로 인한 불이 났다. 작품이고 공구고 뭐고 홀랑 타버렸다. 언젠가는 작업실을 지어야지, 하고 뒀던 땅이 이곳이다. 불 난 이듬해부터 하나둘 내 손으로 작업실을 짓기 시작했다. 작업실은 물론이고 이 집을 채우는 선반, 작업대 등도 다 직접 만들었다. 마당 앞 작은 텃밭엔 파, 상추, 고추도 키우고 대추나무, 감나무, 매실나무, 살구나무, 포도나무도 다양하게 심어놨다. 근데 작업과 전시 스케줄이 바쁘면 제대로 돌보지도 못한다. 어쨌든 안팎으로 다 내 손때가 두텁게 묻은 공간이다.

- 철근과 물을 이용한 설치작업을 2019년부터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작품에 대해 설명한다면.

▶꼭 어떠한 형상을 표현하기보다, 재료를 펼쳐놓은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감성을 살리려 했다. 일종의 개념미술이랄까. 처음 선보인건 2019년 봉산문화회관에서의 전시였다. 당시 철근이라는 재료에 자연의 기본 요소를 끌어들여보자는 생각으로 물과 빛, 소리를 담았다. 펌프로 물을 의도적으로 흔들리게 하고 조명을 비추니 일렁거림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물 속의 철근은 일렁거림으로 인해 어떨 때는 보이고, 어떨 때는 보이지 않는다.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동시에 실체와 비실체의 경계를 나타낸 셈이다.

박휘봉 작가가 도구를 사용해 구부려진 철근의 모양을 잡고 있다. 이연정 기자
박휘봉 작가가 도구를 사용해 구부려진 철근의 모양을 잡고 있다. 이연정 기자
작업실에 놓을 선반을 제작하고 있는 박휘봉 작가. 그는 작업실뿐만 아니라 내부를 채우는 집기들을 직접 다 손으로 만들었다. 이연정 기자
작업실에 놓을 선반을 제작하고 있는 박휘봉 작가. 그는 작업실뿐만 아니라 내부를 채우는 집기들을 직접 다 손으로 만들었다. 이연정 기자

- 철근을 재료로 사용한 이유는.

▶이전 시리즈는 꽃을 주제로 했는데, 철근을 나뭇가지로 이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질적인 것끼리 부딪혀야 그 의미가 확실히 전달되지 않겠나. 고물상에 가서 폐철근 덩어리를 샀다. 철거 현장에서 아무렇게나 구겨지고 뭉쳐진 덩어리인데, 무게가 보통 800㎏ 정도 된다. 엉킨 부분을 일일이 끊어내 철근을 하나씩 빼내 정렬하니 그 구불구불한 선에서 강력한 율동감이 느껴졌다. 물결 같기도, 빗줄기 같기도 하고 모아놓으니 숲 같기도 했다. 건물의 파괴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비의도적으로 구겨진 선들이 마음에 들었다.

- 결국 선으로 만들어지는 작품들인 셈이다. 선은 무엇을 의미하나.

▶내가 다루는 선은 올바르게 곧은 선이 없다. 모두 다르게 생겼고, 변화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상하게 나는 몬드리안의 직선보다 잭슨 폴록의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선이 더 마음에 든다. 그 이유는 선들이 율동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질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마치 인간 사회처럼, 자연처럼 제각각의 선들이 서로 얘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질서를 지키고 있는 듯 느껴진다.

- 작업 과정이 궁금하다. 작업 강도가 보통이 아닐텐데.

▶앞서 말했듯 폐철근 덩어리를 일일이 분해한 뒤, 지렛대처럼 생긴 도구들을 사용해 하나하나 직접 손으로 구부리고 편다. 자르는 건 플라즈마 절단기를 이용하지만, 구부리고 펴는 작업은 직접 내가 조절한다. 10㎜는 힘으로 충분히 당길 수 있지만 12㎜, 13㎜는 버거워서 기계를 이용하기도 하는데, 손으로 하는 것보다 만족스럽지 않다.

펴놓은 철근은 녹슨 부분을 제거하고 코팅, 열처리 작업을 한다. 도색 작업까지 해야 비로소 작업의 재료가 완성된다.

박휘봉 작가의 작업실 한 켠에 쌓인 폐철근 덩어리. 작가는 이를 직접 분해해 일일이 원하는 모양대로 펴거나 구부려 작품을 만든다. 이연정 기자
박휘봉 작가의 작업실 한 켠에 쌓인 폐철근 덩어리. 작가는 이를 직접 분해해 일일이 원하는 모양대로 펴거나 구부려 작품을 만든다. 이연정 기자
박휘봉 작가가 폐철근 덩어리에서 분리해 작업해놓은 철근들을 살펴보고 있다. 이연정 기자
박휘봉 작가가 폐철근 덩어리에서 분리해 작업해놓은 철근들을 살펴보고 있다. 이연정 기자

- 앞으로의 작업 방향은.

▶컬러를 입혀 좀 더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느낌을 더한 작품들에 주력해볼까 싶다. 특히 구부리거나 펴지 않고 덩어리에서 그대로 잘라낸 철근에 색을 칠해, 다양한 표정의 얼굴을 만든 작품 'Image'는 관객 반응도 좋고 스스로도 만족스러웠던 작품이다. 그러한 소품 위주의 작품들을 만들어보려 한다.

-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원동력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아직 하고 싶은 작업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있다. 내 작품이 앞으로 어떻게 더 변할 지 모른다. 계속 고민하고, 만들어내고, 변화하는 게 예술가다. 생각을 하면 변화는 오게 돼있다. 물론 그 과정이 힘들지만 나는 한 곳에 머물기 싫다.

작품이 비상, 꽃, 도시인 시리즈 등으로 변화해온 것도 한계를 느끼면 벗어나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특히나 내가 하는 작업은 스스로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할 수 없다. 나는 지금도 작업활동이 재밌고,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

박휘봉 작가가 지난해 9월 달서아트센터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의 일부. 달서아트센터 제공
박휘봉 작가가 지난해 9월 달서아트센터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의 일부. 달서아트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