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열 대구가톨릭대 프란치스코칼리지 부교수
'논에 들에/ 할 일도 많은데/ 공부시간이라고/ 일도 놓고/ 헛둥지둥 왔는데/ 시를 쓰라 하네/ 시가 뭐고/ 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아는데.'(소화자, '시가 뭐고?')
경북 칠곡군에서는 2012년부터 주민이 중심이 되고 직접 참여하는 '인문학도시 조성사업'이라는 일을 추진했다. 여기에서는 칠곡의 70, 80대 할머니들을 비롯하여 많은 참여자의 노력이 모여 칠곡에 인문학의 한 뿌리를 내리기 위한 활동이 시작됐다. 가난으로, 전쟁으로, 여자라는 이유 등으로 공부 기회를 놓치고 한글조차 미처 깨치지 못했던 할머니들이 바쁜 시간을 쪼개 'ㄱ, ㄴ, ㄷ, ㄹ…'과 'ㅏ, ㅑ, ㅓ, ㅕ…' 한글 공부에 나섰다.
시간은 흐르고 할머니들의 한글 솜씨도 늘어났다. 삐뚤빼뚤 한글 글쓰기도 조금씩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건물과 가게에 내걸린 간판의 까맣고 하얀 글자도 점차 보이기 시작했고, 눈과 세상이 갑자기 환해졌다. 자식과 손주에게 보내는 편지도 직접 썼다. 평소 우체국 여직원에게 부탁했던 봉투 겉면의 주소도 직접 적었다. 손녀 같은 우체국 여직원이 놀라더니 "잘 쓰셨다"면서 칭찬까지 했다. 할매들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2015년 한 해 추수가 끝나고 해도 저물어갈 즈음인 10월 26일, 마침내 강금연 등 89명의 할매가 한글 깨치기 3년 세월 끝에 '시인'으로 등단하며 작품집을 냈다. '칠곡 인문학도시 총서'라는 명분으로 출판된 시집의 이름은 소화자 할매가 쓴 '시가 뭐고?' 제목을 그대로 땄다. 시집의 부제(副題)는 '칠곡 할매들, 시를 쓰다'였다. 칠곡 할매가 중심이 되고, 칠곡 할매가 직접 쓴, 칠곡 할매들의 시였다.
칠곡 할매들의 시 공부는 계속됐고, 시집 발간도 이어졌다. 강봉수 할매 외 118명의 작품이 실린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2016년), 그리고 권연이 할매 등 92명이 참여한 '내 친구 이름은 배말남 얼구리 애뻐요'(2018년) 시집이다. 칠곡 할매들의 이야기와 사연은 시집에서 끝나지 않았다. 2019년에는 '칠곡 가시나들'이라는 영화로 탄생했다. 칠곡 할매들의 시집과 영화 제작, 방영에 이은 또 다른 결실도 있었다. 바로 '칠곡 할매 서체'였다.
2020년부터 칠곡 할매들만의 삐뚤빼뚤하지만 독특한 서체 개발이 시작됐다. 칠곡군은 한글을 깨친 칠곡 할매 400명 가운데 권안자, 이원순, 김영분, 이종희, 추유을 등 다섯 할매의 글씨체를 골라 2천 번 넘는 연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칠곡할매서체를 완성해 무료 보급에 나섰다. 이들 5종의 서체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MS워드와 파워포인트 등에도 탑재돼 2022년 현재 직장인 명함, 식당 간판, 건물 외벽 홍보 문구 글씨체로 쓰인다.
2012년부터 시작된 칠곡 할매들의 10년 인문학 행보가 앞으로 또 다른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칠곡 할매들의 10년 세월에 걸친 배움에 따른 결실의 사례는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고 한 성경 구절만큼이나 배움의 길에 있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줘도 좋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필자도 대학에서 글쓰기 말하기 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 칠곡 할매들의 사연과 시 작품을 소개하기도 했다.
2023년 토끼띠를 맞아 이무임 할매의 '참새'를 읽으며 추위 탓인지 위축된 이웃사랑 모금 활동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본다. 미물인 참새조차도 배를 곯지 않기를 바랐던 세상의 모든 할매들의 따뜻한 마음과 배려의 넉넉한 인심을 배우며 맞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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