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소환된 왕진(往診) 의사

입력 2022-12-22 20:01:30

김교영 논설위원
김교영 논설위원

가죽 가방을 들고 환자 집을 방문해 진료하던 왕진 의사. 왕진은 전 국민 대상 의료보험이 시행되기(1989년 7월) 전까지는 드물지 않았다. 어렴풋한 왕진의 기억. 먼저 부촌의 저택 안방. "회장님, 혈압과 당뇨 수치가 높아졌어요. 술과 고기를 조금 줄이셔야 합니다." "허허, 알겠네. 김 박사." 다음은 달동네 하꼬방(판잣집). "뭐라도 드시고 병을 이겨 내셔야지요. 약값 걱정은 마세요. 병부터 고쳐야지요." "아이고, 선생님. 이 은혜를 어찌…. 병든 몸, 언제 떠나도 상관없지만 손자가 눈에 밟히네요."

왕진 의사는 부자에겐 개인 주치의, 빈자에겐 슈바이처 같은 존재였다. 물론 빈민촌 무료 진료 등을 제외하곤 대부분 서민은 왕진을 경험할 수 없었다. 왕진이 의학적으로 거창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아픈 데를 묻고 청진하고, 수액을 주사하는 정도다. 하나 정서적으론 의미가 크다. '의사가 왔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의사는 왕진을 통해 '병증'에 매몰되지 않고 '사람'을 보게 된다. 왕진을 경험한 의사들은 "왕진을 하면 환자의 삶이 보인다. 가족과 집안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어 치료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IT 기술을 응용한 비대면 진료가 논의되는 시대에 왕진이 소환되고 있다. 재택의료 시범 사업이 대표 사례다. 의료진이 거동이 불편한 노인의 집에 가서 진료하는 것이다.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가 팀을 이뤄 월 1회 노인 집을 방문한다. 전국 28개 의원이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재택의료 서비스는 노인이 황혼기를 집에서 보내게 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대부분 노인은 집에서 임종하기를 원한다. 노인의 56.5%가 '거동이 불편해지더라도 살던 곳에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고 답한 통계도 있다. 현실에선 우리나라 사람 77%가 병원에서 삶을 마친다.

아픈 노인이 혼자 병원에 가는 건 어렵다. 우리나라는 2026년에 초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 이상)가 된다. 왕진은 초고령사회에서 절실하다. 비용 대비 효과 면에서도 유리하다고 한다. 왕진 활성화를 위한 방안이 필요하다. 적절한 왕진 수가 등 의사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노인들을 병원과 요양원에만 맡겨 둘 수는 없다. 노인의 존엄을 지켜주는 건 후세대의 책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