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미의 마음과 마음] 스트레스와 뇌의 면역계

입력 2022-12-22 14:30:00 수정 2022-12-22 18:27:21

소아청소년 때 스트레스는 뇌 구조 변형…가벼운 대화·운동 해소에 도움 돼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선생님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세요?" 진료실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어떤 분은 정신과 의사는 아예 스트레스 없이 살 것 같다고도 하고, 남의 힘든 이야기만 듣는 직업이라서 스트레스가 가장 많을 거라고 위로하는 사람도 있다. 진심어린 조언을 해준 환자 분이 있었다.

오랫동안 우리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오던 남자 환자였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고 가녀린 몸매에 잘 생긴 얼굴까지 더했으니 한 번만 봐도 강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첫 내원 때, 아주 힘든 환자였다.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며 자기는 대구의 유명하다는 정신과의사는 다 만나보았지만 다들 신통찮았고 믿음이 가지 않았다고 하며, 이름을 줄줄이 댄다.

여의사는 처음인데 별 기대가 없다. 강박증 약을 받으러 왔다고 했다. 너무 신랄한 어투에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매주 약을 받으러 왔고 올 때마다 정신과 의사인 나를 테스트했다. 그런 팽팽한 시간이 몇 달 흘렀다. 그가 오는 날은 미리 차트를 훑어보고 다른 환자 보다 우선으로 봐주기도 하고, 논쟁을 피하려고 마음을 가다듬기도 했다. 다루기 힘든 환자를 대할 때 스트레스를 받는 거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병원 대기실에서 청소를 시작했다. 직원들의 손이 닿지 않는 창문 틈, 정수기 뒤에 쌓인 먼지, 신발장 등을 윤이 나도록 깨끗이 닦았다. 청소를 끝낸 그가 생글거리면서 진료실로 들어오면서, 원장님은 애들이 몇 명이에요? 갑자기 돌변한 그의 태도에 당혹스러웠지만, 고맙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해서,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자녀 키우는 게 가장 고민이다, 막내가 걱정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진지하게 듣고 있었고, 올 때마다 아들 안부를 물었다. 그는 내게 진료 시간을 줄이고 아들부터 챙겨라, 시간 지나면 후회한다는 등의 조언을 해주었다. 환자와의 만남이 편해졌고 서로 걱정해주는 관계로 이어졌다. 매주 대기실은 반짝반짝 빛났고, 그가 챙겨준 샴푸와 에센스로 나의 머릿결도 빛났다.

이런 보람으로 정신과 의사 하는 거 같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그는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갔다. 그 후 소식이 끊겼다. 지금도 그가 왜 마음의 문을 열었는지 가끔 의문이 들지만 보고 싶다. 우리 집 막내가 골치 아플 때마다 그가 했던 말들이 떠올라서 후회감도 든다.

나의 긴 머리 환자는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려왔다. 장남으로서 부모님의 기대에 도달하지 못하면 심한 체벌을 받았다. 한겨울에 발가벗긴 채로 쫓겨나기도 했다. 성장기에 스트레스에 많이 노출되면, 스트레스 반응을 감시하는 유전자도 변하고 뇌구조도 변형된다.

오랜 기간 스트레스를 받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자가면역질환, 심혈관질환, 암 등 각종 신체 질병이 증가한다. 우울증, 강박증, 불안장애 등의 정신 질환이 생길 위험성도 3배 이상 높아진다. 성장기에 있는 소아청소년에게 스트레스는 뇌 구조를 변형시킨다. 특히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가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서, 신경 회로 망이 엉성해지고 결국 위축되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

해마는 주변에 적절하게 감정 반응을 하고, 사회의 일원으로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나의 강박증 환자는 어디선가 잘 지내리라 믿는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연일 강추위다. 코로나 확진자 수는 여전히 증가하고 다음 주는 실내 마스크를 벗을 수 있을지 미지수다.

그동안 코로나에 감염된 사람들의 공통적인 증상은 목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는 것이다. 밤이면 고열에 시달리고 사회와 단절된 시간을 보내야했다. 격리를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하지만 여전히 머리가 안개가 낀 듯이 몽롱하고 맥이 없다고 한다. 밥맛도 없고 소화가 안되고 피곤하고 눈꺼풀이 무겁다. 일종의 브레인 포그 증후군(brain fog syndrome)이다.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몸은 감염병을 이겨냈지만, 뇌 신경계는 여전히 아픈 상태이기 때문이다.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침입하면, 백혈구가 일차 방어군으로 나서서 싸운다. 이 과정에서 생긴 면역 반응으로 열이 나고 머리가 아프고 근육이 쑤신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증상으로 환자 신세가 되지만, 일주일 정도 지나면 회복되어 일상생활로 돌아간다.

하지만 평소에 스트레스와 과중한 일로 시달린 현대인들은 쉬는 것을 힘들어한다. 일중독자들은 휴가를 주면 더 괴로워한다. 놀 줄도 모르고 놀 사람도 없고, 휴가를 가서도 일 생각이 나서 전화기를 꺼두지 못한다. 아프기 전에 병을 예방하고 쉬어주고 자기 건강을 위한 노력은 거의 하지 않는다. 아프고 나서야 쉬게 되니, 다행히도 감염은 파열될 듯이 달리는 엔진에 브레이크 역할을 해준다.

쉬어야 재충전해서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닌가. 우리 면역계는 아주 영민해서 모든 자원을 우선적으로 낫는데 투입한다. 브레인 포그가 지속되면 아직 더 쉬어가라는 신호이니 육체적 정신적 여유를 가져야 한다.

뇌의 면역계는 정서적 스트레스도 세균의 침입처럼 인식해서 염증 반응을 일으킨다. 이때 분비된 사이토카인은 신경전달물질과 뇌 회로를 망가뜨려서 뇌기능을 떨어뜨린다. 실제로 우울증 환자의 혈중 염증 유발성 사이토카인의 수치가 매우 높은 것은 중요한 소견이다.

긴 코로나 팬데믹이 사람들에게 어떤 후유증을 남길지 앞으로 예의주시해야 할 이유다. 겨울에는 일조량이 줄어들고 기분도 처지고 몸도 굳어지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신체적 통증이 지속되기도 한다. 우리의 해마가 코로나 스트레스에서 건강하게 잘 버티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까운 사람들과 가벼운 대화나 운동, 노래 가사 외워서 부르기 등의 활동도 좋다.

스님이 참선을 하다가 꾸벅 졸 때가 있다면, 그 순간이 뇌가 가장 편안한 모습이다. 명상파인 알파파가 파아란 하늘 빛깔이 되어 마구마구 나오고 있을 때다. 인생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조금 더 수월하게 느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에 느린 걸음으로 다가가 보자. 해 질 녘 가로수의 긴 그림자가 위로가 되는 텅빈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