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독신의 삶, 엘리자베스 1세 사후 '튜더 왕조' 막 내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서거 국면을 맞아 지난 호에서 영국 고대 켈트족 여왕 부디카의 대로마 항쟁, 색슨족 여왕 에셀플레드의 대 바이킹 항쟁, 그리고 중세 엘리노어의 문화사적 의미에 대해 살펴봤다. 이번에는 25살에 여왕이 돼 영국을 근대 유럽 해양강국으로 만든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와 삶을 들여다 본다.
◆스페인 무적함대(Armada) 물리치려 해적 발탁
영국의 본섬인 브리튼 섬 남서쪽 끝자락에 플리머스라는 아름다운 항구도시가 자리한다. 시내 중심가에서 동남쪽 바닷가 언덕으로 가면 대서양을 향해 큰 공원이 나온다. 플리머스 호(Plymouth Hoe) 공원이다. 공원 한가운데 높은 받침대 위로 인물 조각이 위용을 뽐낸다.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응시하는 예리한 눈빛의 동상 주인공은 누구일까? 바다를 제패한 위대한 인물로 영국에서 기억되지만, 스페인에서는 해적으로 불리는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0년-1596년)다. 영국을 나폴레옹의 위협에서 구한 19세기 초 넬슨 제독과 함께 영국의 2대 바다 영웅으로 추앙된다.

1588년 7월 28일 프랑스 칼레 항 해상. 유럽 해양패권을 놓고 영국과 스페인 함대가 맞붙었다. 스페인의 대표선수는 무적함대 아르마다(Armada). 스페인은 1492년 콜럼부스를 지원해 인도 가는 길을 찾는 과정에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식민지로 삼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데, 같이 나눠 먹자고 영국이 도전자로 나섰다.
스페인 필리포스 2세는 1588년 5월 전함 127척에 해군 8천명, 육군 1만 9천명, 대포 2천문의 무적함대를 조직해 영국으로 쳐들어갔다. 영국본토를 쑥대밭을 내어 경쟁자의 싹을 잘라 버리겠다는 의도였다. 스페인 함대는 17년 전 1571년 그리스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투르크 해군을 물리쳐 유럽최강을 확인하며 기세등등하던 터였다.
더구나 영국 전함은 80척, 병력은 고작 8천여명으로 열세였다. 스페인 무적함대는 그러나, 칼레 해상에서 영국 해군의 화공(火攻)에 치명적으로 궤멸됐다. 예상을 뒤엎은 영국승리의 주역이 영국함대 부제독 드레이크다. 이를 기념해 드레이크의 고향이자 그가 시장을 지냈던 플리머스 시 당국이 호 공원에 기념동상을 세운 것이다.

◆무적함대 물리치고 아메리카와 세계로 진출
드레이크는 스페인 입장에서 악명높은 해적이었다. 아메리카 각지에서 스페인 선박을 약탈했기 때문이다. 필리포스 2세가 드레이크에 건 현상금은 현재 가치로 880만 달러, 100억원에 달한다. 영국 입장에서 뒤집어 보면 드레이크가 큰 돈을 벌어왔다는 의미다. 신분 사회 영국에서 드레이크는 귀족이 아니어서 고위직에 오를 조건이 안됐다.
그런데도 엘리자베스 1세가 드레이크를 중용한 이유는 바다 모험에 모든 것을 걸었던 그의 인생 역정에 있다. 드레이크는 1577년부터 1580년까지 세계 일주 항해를 성공시켰다. 대서양을 건너 남아메리카, 캘리포니아, 태평양, 필리핀, 아프리카 남단을 거쳐 영국까지 코스를 악조건 속에 항해했다. 비록 스페인보다 50여년 늦었지만, 후발국 영국에 큰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세계 일주를 성공시킨 드레이크의 공로를 인정해 이듬해 1581년 기사작위를 내렸다. 이어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에 맞설 책임자로는 귀족 출신 제독 아래 드레이크를 부제독으로 삼아 사실상 작전을 이끌 기회를 줬다. 1588년 아르마다를 제압한 영국 앞에 이제 해양진출의 장애물은 없었다.
1607년 버지니아에 죄수들을 보내며 아메리카 개척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어 1620년 청교도 필그림 파더즈(Pilgrim Fathers)를 계기로 식민지 개척을 본격화했다. 해양 제국, 해양 부국의 문이 열렸다. 그 기초를 다진 군주가 1558년부터 1603년까지 45년간 왕위를 지킨 엘리자베스 1세 여왕(1533년-1603년)이다.
◆투옥과 가택연금을 딛고 여왕 돼 큰 업적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는 헨리 8세다. 스페인 공주 캐더린과 결혼했지만, 앤볼린(엘리자베스 1세 생모)과 재혼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에서 영국 국교회를 분리한 인물이다. 엘리자베스는 생모 앤볼린이 간통혐의로 처형되면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더구나, 4살 아래 이복 남동생 에드워드 6세와 17살 위 이복언니 메리 1세가 있어 왕이 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1547년 엘리자베스가 14살 때 아버지 헨리 8세가 숨지고, 왕위를 계승한 에드워드 6세가 1553년 15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헨리 8세 여동생의 손녀 제인 그레이가 여왕으로 옹립됐지만, 9일 만에 밀려났다. 헨리 8세의 큰 딸 메리가 왕이 됐다. 외가 스페인 왕실의 영향을 깊게 받은 메리는 스페인 관행대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대대적인 신교도 탄압을 벌여 '피의 메리'라는 별칭을 얻었다. 신교도인데다 왕위 경쟁자로 여겨진 엘리자베스는 1554년 반역 혐의로 런던탑에 수감됐다. 다행히 가택연금으로 수위가 낮아졌지만, 불안한 삶이 이어졌다.
변화는 메리 여왕의 불임에서 찾아왔다. 1555년 메리 여왕의 상상임신이 알려지면서, 39살 메리 여왕의 출산 가능성에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엘리자베스의 왕위 계승 가능성이 높아졌다. 엘리자베스가 아니면 5촌 조카인 스코틀랜드의 메리(헨리 8세 누나 마가렛 공주의 손녀)였다. 결국 메리 여왕은 1558년 42살로 숨지면서 이복 여동생인 25살의 엘리자베스에게 왕위를 넘겼다.
엘리자베스 1세는 언니 메리의 가혹한 신교도 탄압 정책을 완화해 종교 화합을 도모하고, 화폐개혁 등 경제개혁을 추진했다. 1597년 구빈법을 제정해 영국 빈민정책의 기초를 닦았다. 세익스피어라는 걸출한 작가가 영국문학의 금자탑을 쌓은 것도 이때다. 한가지 흠이 있었으니, 독신으로 산 탓에 후손을 남기지 못한 거다.
◆유부남을 사랑했지만, 결혼하지 않은 독신 여왕
1547년 헨리 8세가 숨질 때 왕비는 6번째 왕비인 캐더린 파였다. 그녀는 상이 끝나자 곧바로 세이무어 남작을 새남편으로 맞았다. 14살 엘리자베스는 양어머니 캐더린 파 부부와 함께 살았다. 후견인이 된 세이무어 남작이 엘리자베스에게 성적 접촉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듬해 1548년 캐더린 파가 출산도중 숨지자, 세이무어는 15살 엘리자베스와 결혼까지 추진했다.
이런 괴롭힘은 1549년 세이무어가 반역죄로 참수되면서 끝을 맺었다. 어린 시절 성적 학대를 당했던 엘리자베스 1세에게 많은 구혼자들이 나타났다. 합스부르그 왕가의 오스트리아 찰스 2세, 프랑스 앙주 공작 헨리, 헨리의 동생인 22살 연하 앙주공작 프란시스…. 구혼행렬은 엘리자베스 1세가 50살이 될 때까지 이어졌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1세가 사랑했던 남자는 있었다. 1살 많은 로버트 더들리. 문제는 유부남. 1558년 엘리자베스가 왕이 됐을 때, 더들리의 아내는 병이 깊었다. 그녀가 죽을 경우, 엘리자베스와 더들리의 결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1559년 더들리의 아내가 죽었는데,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죽은 사고사…. 엘리자베스는 더들리를 레스터 백작으로 삼고, 지속적으로 중책을 맡기며 부와 명예를 안겨줬다.
더들리는 1578년 레티스 놀리와 재혼했고, 엘리자베스는 그녀를 평생 미워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는 끝내 후계자도 지명하지 않았다. 후계자를 지명하는 순간 권력의 무게추가 옮겨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1세가 70살에 숨을 거두면서 튜더 왕조는 문패를 내렸다.
왕위는 스코틀랜드 메리의 아들인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 제임즈 6세)에게 돌아갔다. 스튜어트 왕조다. 엘리자베스 1세는 런던 웨스터민스터 사원 왕실 묘역에 안장됐다. 영욕을 함께 했던 언니 메리 여왕과 나란히 묻혔다. 이번에 숨진 엘리자베스 2세는 런던 교외 윈저성에 안장됐다.

역사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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