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 대표 고(故) 이원식 선생의 아들 이광달 씨 인터뷰
1946년 10월 항쟁 이후 이 선생 가족들 군경 감시에 시달려
광달 씨 어머니 경찰에게 끌려가 '가창골' 학살 추정
항쟁의 끝에서 연좌·보복…1946년 이후 5년여 간 이어진 민간인 학살
"아버지가 10월 항쟁 관련자라고 8살인 저를 총으로 위협하고, 물고문까지 했습니다. 아무 죄 없는 어머니가 경찰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그 날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지난달 취재진이 만난 이광달(79) 씨는 경북 경산 자택 내 아버지 고(故) 이원식(1913~1978년) 선생 흉상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씨는 자택에 아버지와 어머니 정정희 씨의 방을 따로 만들었다. 영정 앞 향로에는 늘 향을 피워놓는다.
대구 중구 계산동에서 '영천의원'을 운영하던 의사 이원식 선생은 대구 10월 항쟁의 핵심 인물이었다.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수학·기하학·서지학 등 학식이 뛰어났던 그는 1946년 10월 당시 대구부청에서 경찰과 협상한 군중 대표 중 한 사람이었다. 1946년 9월 노조 파업에 대한 글을 신문에 쓴 이력 탓에 1947년 미군 포고령 제19호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다.
1946년 10월의 시위와 봉기는 며칠 만에 끝났지만, 가족의 시련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10월 항쟁 관련자라는 이유로 끊임없는 군경의 감시를 받았다. 이 선생이 한국전쟁 발발 후 독립운동가와 빈민들을 치료해준 것도 당국의 의심을 샀고, 결국 도망치는 신세가 됐다.
아들 이 씨는 "수시로 경찰이나 군인들이 와서 '아버지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 집 방안에 큰 구덩이를 파서 아버지가 들어가면 위에 장롱을 올려둬 못 찾게 했다. 언제 경찰이 올지 모르니 아버지는 거의 모든 생활을 구덩이에서 했다"고 증언했다.
이 선생은 대구 중구 남산동 본가와 앞산 인근 큰 집, 장관동 외가 등을 옮겨 다니며 감시를 피했다. 군경의 인내심은 길지 않았다. 1950년 8월 7일 저녁, 이 선생을 찾지 못한 경찰은 아내 정정희(광달 씨 어머니) 씨를 대신 데려갔다. 이튿날 정 씨는 가창골로 끌려가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선생은 옥중 일기에서 "(1950년) 7월 19일부터 백부님 집 뒷마루를 공사해 그 밑에서 지냈다. 아내는 경찰에 구속되고 8월 8일부터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10월 18일 경찰국에 출두해 수감자 명단을 봤지만, 아내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어린애처럼 울기만 했다"고 적었다.
대구경북의 10월 항쟁은 일주일 만에 진압됐지만, 후유증은 길었다. 관련자들은 군경의 감시를 받다가 차례차례 끌려가 학살됐다. 경북의 농촌과 산지에선 군경과 빨치산(유격대)가 '상대방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죽였다. 정정희 씨처럼 가족을 대살(代殺) 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대구의 가창골과 경산 코발트광산, 청도 곰티재 등 1946~1950년 사이 일어난 대구경북의 민간인 학살은 개별 사건으로 보이지만, 10월 항쟁에 뿌리를 뒀다. 연좌와 보복에 의한 희생이 수년간 이어진 것이다.
1960년 제4대 국회 조사 자료에 따르면 공식 집계된 대구경북(문경·선산·청송·봉화 제외)의 민간인 피학살자는 5천82명에 이른다. 보복과 낙인이 두려워 희생 사실을 밝히기 꺼렸던 당시 분위기를 고려하면, 실제는 두세 배인 1만4천~1만6천 명이 희생됐을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한다. 이는 제주 4·3의 희생자 1만4천533명(지난해 6월 집계 기준)과 비슷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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