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규의 행복학교] 이미 용서했더라도 애미를 용서하거라

입력 2022-09-16 13:30:00 수정 2022-09-16 17:34:19

최경규

"코로나로 인하여 조문은 받지 않습니다"라는 말로 끝을 맺는 문자, 요즘 들어 자주 받곤 한다. 지천명의 나이, 아직은 자식 결혼 소식보다는 문상 가는 일이 더 많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어릴 적 친구들과 부모님을 여읜 슬픔을 나눈 일을 생각해보면, 철드는 것과 관계없이, 세월은 쉬지 않고 잘도 가는 듯하다. 장례식장에서의 상주 얼굴은 대부분은 수척하고 눈망울에는 세상을 잃은 듯한 서러움이 느껴진다. 그야말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는 말이 적합하다. 하지만 때로는 다른 모습을 볼 때도 있어서 세상 살아가는 방식이 각기 다름을 느끼기도 한다.

"당신은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어, 내가 받은 거라고는 제대로 된 졸업장 하나 없는데, 정말 피땀을 흘려 여기까지 왔는데 너무 바라는 것이 많으셨어." 돌아가신 아버님의 영정 앞에 그의 퉁명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흔히 말하는 자수성가한 30년 지기 친구에게 그간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나, 떠나보낸 아버님과 애틋한 정(情)이 없었던 것은 확실하였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세상에 사는 인간인지라, 단정 지어 그 친구를 함부로 생각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세상 가장 가까운 분, 이승에서의 마지막을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아쉬움은 돌아오는 길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세상이 그리 길지 않음을 그리고 그 역시 언젠가는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을, 왜 그리 매정하게 당신을 떠나보내야만 한 것인지를 말이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지 않겠는가? 머리카락을 잘라 돈을 마련해 자식들 고기반찬 해주고 싶고, 피라도 뽑아 팔 수 있다면 어지러움으로 쓰러질지언정 새끼들의 해맑은 웃음소리 한 소절에 만족하는 것이 우리 부모님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최소한 내가 배운 부모님의 사랑은 그러하였다. 그러나 무엇이 바르게 사는지도 혼돈되는 세상, 부모와의 사이도 예전과 사뭇 다른 것 같다.

◆부모는 당신의 거울이다

세상에서 태어나 제일 먼저 보는 사람들은 바로 부모이다. 울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해야 했던 시절, 아버지의 듬직한 등에 업혀 새근새근 잠자며 남자를 처음 알게 된다. 남들 시선은 중요하지 않고, 내 새끼 배고플까 봐 당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게 만든 어머니, 당신을 통해서 사랑을 알고,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자식을 하나둘 낳으면서 점차 무거워지는 어깨 위 짐의 무게, 저녁이면 막걸리 한잔에 시름을 잊으려는 부모님의 한숨 소리를 우리는 보지 못하였고 듣지 못하였다. 어쩌면 바라기만 했었던 철없는 시절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친구네 부모를 부러워하며 내가 가진 것이 적음을 은연중에 말하는 그 시간 속에서 우리네 부모님의 여린 마음에 생채기가 나고 또 새살이 돋아났을 일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을 '그때 알았더라면'이라는 후회가 가슴에 밀려온다.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는 생각, 한 번 정도 해 보았는가?

부모도 우리가 선택해서 태어난다. 인도에서는 자신이 전생에서 마치지 못한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이승에 태어난다고 믿는다. 그 일의 완성을 위해 적합한 부모를 당신이 선택한 것이다. 고행의 길 끝에서 얻는 그 무엇의 완성을 위해 당신이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난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부모를 잘 모시는 일은 곧 자기를 위하는 일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부모에 대한 의미는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진실한 테마이자, 너무 늦게 풀리는 숙제이다. 시인 킴벌리 커버거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시를 보면 어릴 적 미처 알지 못했던 과거의 아쉬움을 엿볼 수 있다.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부모는 자신 목숨보다 자식을 더사랑해

세상 부모 대부분은 표현의 차이뿐 자신의 목숨보다 자식을 더 사랑한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표현이 오히려 인색하게 느껴질 만큼 말이다. 만약 그렇지 않은 부모를 모시고 있다고 말하는 이는 표현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라 여겨도 좋을 듯하다.

부모 역시 사람이었기에 때로는 후회를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또한 자식을 위함이었을 것을, 여기에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자식에게 더 해주지 못했던 후회, 임태주 시인 어머니의 마지막 편지에서 애틋한 어머니의 정을 느낄 수 있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중략>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애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애미를 용서하거라.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보지 못하고 비로소 부모가 되어서야 지금껏 받기만 했었던 사랑의 크기를 실감하고, 그 존재 자체만으로 감사하게 된다.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무엇이 소중한지, 어떻게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바르게 살아가는 것인지 부모님에게 찾아가 허리를 숙이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세상 흐름을 모른다고 타박하고 무시하는 것이 아닌, 조건 없는 사랑으로 숨을 멈추는 그날까지 당신만을 바라볼 유일한 사람에게 이제는 따스한 눈빛으로 보답을 해드릴 시간이 온 것이다.

뿌리가 튼튼해야 열매도 잘 열리는 법이다. 뿌리에 물을 주는 것을 무시하고 열매나 꽃이 예쁘게 열릴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더 늦기 전에 알았으면 좋은 일, 가을의 낙엽 소리가 벌써 들려오는 듯하다.

최경규

최경규 심리상담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