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멈추지 않는 할아버지의 시계…생전에 사랑한다고 말씀 못 드려 후회"
누구나 사람과의 추억을 가지고 있고, 그 사람을 떠올리게끔 하는 매개체가 있을 것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쓰시던 수많은 물품들도 그러하다. 지난 봄 작고하신 할아버지의 유품들을 정리하면서, 그분이 쓰신 일기며, 남긴 앨범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할아버지에 대한 많은 것을 새롭게 알게되었다, 돌아가신 다음에야 비로소….
할아버지를 떠올리게는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분 것이 아니기에, 느끼는 괴리감과 상실감을 느끼며 남은 물건들을 보고있자면 슬픔만 더해가곤 한다. 단 하나, 아직도 현재진행중인 것이 있다. 낡았지만 여전히 작동중인 붉은 탁상시계. 아주 소싯적부터 할아버지댁 한 켠에서 묵묵히 이 모든 일상사를 지켜보았을 시계. 할아버지만큼 오래산 시계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할아버지 인생의 절반이상을 함께해온 시계가 아닌가 하는생각이 든다.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과묵하고 근엄하신 분이셨다. 작고하시기 2년전부터 치매도 있고, 거동도 불편해지셔서 보훈병원에 계셨다. 내가 찾아올 때마다 기억을 잃어가시는 중에도 매번 손자를 알아보고 아이처럼 웃으시며 좋아하시는 것을 보니 평소에 안하시던 애정표현이 무의식중에 나온게 아닌가싶어 기쁘기도 하고, 정정하실 때조차 정작 나는 사랑한단 어떤 표현도 해드리지 못했던거 같아 슬프고 후회되기도 했었다.
어느 외국 동요속 노랫말처럼, 행여나 시계가 멈추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주 건전지를 갈아주곤 했었다. 그렇게 시계가 멈추지않은 이상 할아버지께도 언젠가 다시 일어서실걸로 믿었다. 정정하신 모습으로 일어서신다면 비로소 나도 할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할아버지께서는 어떠한 나에게 어떠한 말도 듣지 못한채 떠나셨다.
주인이 떠나면 할아버지의 시계도 멈출 것 같았으나, 할아버지의 시계는 주인이 떠나도 멈추지 않았다. 1분 1초, 그분이 애타게 기다리셨을 지금 이 순간이 오롯이 흘러 지나간다. 일상의 상념(想念)은 상념(傷念)이 되어 1분 1초 매순간마다 아픔이 되어 생생히 느껴진다. 생전에 치매가 있으셨기 때문에, 매번 나를 보실때마다 묻곤 하셨다. "어디에서 근무하니?", "결혼해야지"하시며….
그나마 나는 대구에서 자주 병문안을 갔기에 할아버지께서는 손자의 존재는 또렷히 기억하셨다. 먼곳에 계셔서 자주 볼 수 없었던(게다가 코로나19 이후 더더욱 왕래가 없게된) 삼촌들의 경우엔 그 존재조차 기억하지 못하셨다. 같은 질문을 하실때마다 나 역시 같은 대답을 해드릴 수밖에 없었다. "수성구청에서 근무해요", "곧 결혼할거예요. 증손자 보셔야되니까 얼른 일어나셔서 집으로 오셔야지요" 어떤 영화에서 기억상실증의 연인에게 매번 프로포즈를 한 주인공처럼 말이다.
영화 주인공과는 달리 나는 그저 기계적으로 대답했었던 것 같다. 말씀은 안하셨어도, 애타게 손자가 결혼하여 어엿한 가정을 일구는 것을 보고싶어 하셨을텐데, 결국 손자가 결혼하는것도, 며느리도, 증손자도 보지못하고 떠나가셨다.
장례식에서 다들 "너희 할아버지는 자녀들, (나를 제외한)손자들 다 대성하고 결혼하는거 보고가셨으니, 여한이 없으실거다 호상(好喪)이다" 라고 하셨지만, 할아버지의 희미해지는 기억의 끝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있는사람이 몇 안되었을텐데, 자녀들 손자들 인식도 못하시고 가신 것이 과연 호상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결혼하려는건 아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기전에 이처럼 회한이 남는일은 더는 없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십수년전 대학입학하기전 나에게 술잔을 채워주시며, 당부하듯 말씀하셨던게 기억난다. "자네 믿는다." 대학가서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 되어라는 통상적인 뜻에서 하신 말씀은 아닐 것이다.
- .........내가 만약 한 생명의 고통을 덜고, // 기진맥진해서 떨어지는 울새 한 마리를 // 다시 둥지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 나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
한 시인의 시처럼 누구가의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을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은 할어버지의 술잔을 받을 수 없지만, 이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다. "저를 믿고 이제는 편히 쉬십시오."
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가 생각나신다며 대부분의 유품들을 처리하셨다. 할아버지의 시계는 내가 따로 보관해두었다. 언젠가 할아버지의 시계는 아버지의 시계가 될것이고, 또한 나의 시계가 될 것이므로. 할아버지의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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