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북한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변화'와 '공존'에 대한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변화'란, 북한이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이 되어 소위 불량국가군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공존'이란 미래세대의 번영과 평화통일의 민족적 염원을 담은 여러 필수적인 사업들을 기꺼이 함께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북한위험'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이 위험 수위 여하에 따라 '변화'와 '공존'의 여지는 좌우될 수 있다.
따라서 '변화'와 '공존'을 논하기 전에 북한위험을 어떻게 관리하느냐하는 '북한위험관리'는 더 중요한 주제라 하겠다. 북한은 3가지 위험요인을 안고 있다. 체제의 비효율성, 북한판 교조주의, 과도한 군사력이 그것이다. 북한은 국제사회에 체제안전을 호소하려면 핵무기를 들고 흔들 것이 아니라 이 위험요인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 청사진부터 먼저 제시해야 마땅할 것이다.
첫째, 북한체제의 비효율성이다. 한 국가가 영속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정통성'과 함께 체제의 '효율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국제사회는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북한을 실패한 체제로 규정한 바 있다. 배급제는 사실상 붕괴되어 사회주의 경제를 망칠 것이라고 했던 장마당이 공식적으로 300곳을 넘어서면서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섰다.
마이너스 성장이 지속되고 국가부채는 디폴트 상태에서 회생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더 큰 문제는 북한 자체의 진단에 있다. 그들은 이러한 경제난의 주된 원인을 미국의 대북제재 탓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2017년 이후 유엔제재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북한 경제난이 가중된 측면은 있지만, 본질은 아니다. 2008년 6월 27일 부시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 법안과 적성국교역법안을 해제하였다.
이 두 법안은 북한이 그간 줄기차게 주장해 오던 대표적인 대북제재 법안이었다. 그러나 이 법안의 해제로 북한의 경제난에 숨통이 터졌다는 소식은 없다. 트럼프 행정부는 2017년 11월 김정남 암살사건을 계기로 9년만에 다시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했다. 북한은 의미없는 반발을 격렬하게 했다.
경제난의 해결 보다 '외부 탓'을 들어 내부를 결속시키는 일이 더 급하고 중요할 뿐이다. 물론 북한도 체제의 구조적인 모순을 해결하고자 나름대로 몇몇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시작만 있었을 뿐이다. 이는 북한 수뇌부와 인구 약13%에 해당하는 노동당 당원의 뇌리에 '개혁은 곧 붕괴'라는 등식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우리식 사회주의'의 생존방식은 핵무기를 통한 '갈취'라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돌이켜 보자. '98년 포용정책이 한창이던 당시, 식량, 비료, 경공업 원자재 지원 등을 빼더라도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개방에 따른 대가로 북한에 들어간 현금은 약 30억불이다. 이 많은 현금과 물자가 그간 어디에 어떻게 쓰여졌는지, 북한의 변화를 유도한다는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전혀 원치 않은 곳에서 그냥 밑빠진 독이 되었다.
제네바 합의가 한창 진행되던 '98년 당시 북한은 금창리에 큰 지하굴을 파면서 우라늄 핵개발에 대한 의혹(HEU 프로그램)을 더 하였다. 미국과 IAEA(국제원자력기구)측은 이를 합의 위반으로 규정하고 현장을 공개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북한은 1회 방문때마다 3억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북한은 따로 농사를 지을 것 없다, 땅만 파면 돈이 나오고 쌀이 나온다'는 조소가 나돌았다.
'갈취외교'라는 말이 나온 것은 바로 이 시점이다. 국제사회에 부끄러운 일이다.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한에 들어간 중유만 해도 약 450만톤, 6억불이상 어치다. 당시 인도적 지원을 포함하여 북한에 대한 최대 지원국은 다름 아닌 미국이라는 사실을 아는 국민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네바 합의가 결렬된 이후 미국은 북한을 향해 '잘못된 행동에 보상은 없다'는 원칙을 견지하고 있다.
북한이 자초한 것이다. 2006년 7월 제19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북한(권호웅 내각참사)은 우리에게 식량 50만톤과 경공업 원자재등을 요구하면서 "(북한의) 선군(先軍)이 남측의 안전을 도모해주고, 남측의 광범위한 대중이 선군의 덕을 보고 있다"는 발언을 하고, "선군정치의 최대 수혜자가 남측이기 때문에 남측이 보상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북한 통일신보의 보도가 나오자, 우리 국민들은 분노했다.
'우리가 언제 너희들한테 지켜달라고 했냐'며 격분했다. 하지만 우리는 곧잘 잊는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 북측 응원단이 왔다. 우리는 크게 환호했다. 온갖 비용과 편의를 제공하면서 그들이 한껏 체제선전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당시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은 워커힐 호텔에 머물면서 통일부 장관에게 '국민연금 800조원 중 200조원을 북에 넘겨야 할 것'이라며 핍박하였다.
정상국가라면 도저히 취할 상례가 아니다. 어디 이 뿐인가. '갈취'는 마약, 불법무기 거래, 위조지폐 등으로 이어져 국제사회로부터 소위 '불량국가'로 낙인받았다. 해외 금융기관에 대한 사이버 테러는 심각하다. 한 조사에 의하면 2019년부터 2020년 11월까지 북한은 3억1,640만불 어치의 가상 자산을 탈취했다고 한다. 김정은은 2013년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경제와 핵무력 병진 노선'을 내걸었다.
핵무력은 눈에 띄게 고도화되고 있다. 경제는 중국이 최대 후원국이다. 2021년 대외무역의 95.2%가 중국이다. 그나마 중국이 느슨하지만 유엔제재에 참여하면서부터는 중국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김정은은 9년만에 '병진노선'의 실패를 자인했다. 이제 미‧중 대결구도를 회생의 호기로 여길 형편에 있다.
북한체제의 비효율성은 비단 경제 분야 뿐아니라 사회 곳곳에 만연되어 북한을 외부 위기와 긴장요인에 의존하는 위험한 체제로 점점 몰아가고 있다. 남북관계 역시 중요한 돌파구이다. '비효율성'이 심화되면 될수록 체제의 버팀목, '정통성'에 영향을 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대북정책은 북한이 더이상 비효율적인 체제를 고집하지 않도록 하는데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간 우리는 북한의 '변화'와 '공존'을 위해 비용을 치를 만큼 치뤘다. 반면 북한은 언제라도 민족을 앞세우고 핵을 카드화하여 또다시 '갈취'에 나설 수 있다. 지금은 유엔제재 국면이다. 섣부른 외부 개입은 자칫 북한 내부의 자생적 동인(動因)을 무디게 할 수 있다. 정부는 안보를 튼튼히 하는 가운데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윤광섭, 전 국가안보회의 위기판단관, 예비역 육군소장,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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