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달밤의 여행자를 그린 김기창의 경쾌한 소품

입력 2022-07-29 13:46:02 수정 2022-08-01 07:33:27

미술사 연구자

김기창(1913-2001),
김기창(1913-2001), '기려도(騎驢圖)', 1984년(72세), 종이에 채색, 지름 21㎝, 개인 소장.

김기창의 '기려도'다. 특이한 동그란 형태여서 어떤 필요가 있어 즉석에서 흔쾌히 붓을 들어 그렸을 것 같다. 손이 가는대로 그려낸 경쾌한 필치가 시원하다. 소품이지만 '갑자(甲子) 춘(春) 운보(雲甫)'로 서명하고 인장을 갖춘 당당한 작품이다.

김기창은 바보산수 화풍으로 '기려도'를 그렸다. 이 그림을 그린 1984년은 그의 나이 72세 때로 바보산수가 한창 인기를 끌던 시기이다. 사리를 모르는 바보가 그린 산수화, 바보같이 어수룩한 산수화인 바보산수는 변화가 많았던 김기창의 작품세계 중 민화에서 영감을 받아 펼쳐낸 세계다.

20세기 중반까지 민화는 생활문화의 하나로 여겨졌을 뿐 지금처럼 감상과 수집의 대상인 예술품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회화의 관례와 미술의 상식을 아랑곳하지 않는 민화가 현대의 감상자들을 매혹시키는 힘을 김기창은 화가의 안목으로 일찍이 알아보았다. 기상천외하게 솔직하고, 화려하면서 단순한 민화의 이미지가 갖는 고유한 매력을 예술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남 먼저 수집한 김기창이었기에 바보산수가 나올 수 있었다. 김기창은 민화를 창조적으로 재탄생시켰다.

산뜻한 색감의 단 붓질로 쓱쓱 그려낸 것은 나귀를 탄 달밤의 여행자다. 봇짐 진 심부름꾼을 거느린 여행자 위로 드리운 소나무 가지 끝에 푸른 초승달이 걸렸다. 안장은 붉은 색이고 옷차림은 옥색인데 방한용 머리쓰개를 보면 계절은 겨울이다. 저 멀리 산 아래 마을까지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기려도'는 김기창이 보아왔던 감상화나 화보의 잔상들이 뭉뚱그려져 나타난 그림이다. 조선시대에 자주 그려진 기려도는 눈보라치는 겨울이거나, 오리무중의 안개 속이거나,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한다.

원래 이 주제가 당나라 때 재상이자 시인인 정계에게 누군가가 요즘 시를 좀 지으셨냐고 묻자 "시는 풍설(風雪) 중에 파교를 건너는 나귀 위에 있는 것이지, 이곳(장안)에서 어떻게 얻겠소?"라고 대답한 일화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꼭 당나귀인 것도 그래서이다. 기마도(騎馬圖)나 기우도(騎牛圖)와 달리 기려도의 주인공은 시인이다. 나귀는 느려서 위험하지 않고 덩치도 작아 소박하고 운치 있는 탈 것으로 여겨졌다. 나귀 탄 인물 그리는 법이 '개자원화전'에 "시사재(詩思在) 패교여자배상(壩橋驢子背上)"으로 나온다. "시상은 패교의 나귀 등 위에 있다"고 했다.

파교(패교)를 건넌다는 것은 장안으로 상징되는 번잡한 도시를 벗어난다는 뜻이다. 여행은 일상의 반복을 멈추고 새로운 장소를 경험하는 나를 새롭게 만나는 일이다. 그래서 행만리로(行萬里路)를 독만권서(讀萬卷書) 만큼 중요하게 여겼다. 올 여름 휴가를 떠난 여행자들께서 충만한 영감으로 돌아오시기를….

미술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