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처벌' 피하려 행정실 직원에 '시설물 안전 관리' 떠넘기는 교육청·학교

입력 2022-07-01 17:39:00 수정 2022-07-02 10:13:55

인건비 증가 부담…전문성 갖춘 시설관리직 신규 채용 안해
일부 행정직 "가스·소방·승강기·놀이시설·석면 관리…취업사기 당한 기분"

대구 수성구 한 고등학교 모습. 기사 내용과는 무관함. 매일신문 DB
대구 수성구 한 고등학교 모습. 기사 내용과는 무관함. 매일신문 DB

전국 교육청과 일선 학교가 중대재해처벌법 상 중대산업재해 처벌을 피하겠다며 교육행정직 공무원들에게 소방이나 전기, 석면철거 등 시설물 관리를 맡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 자격증을 보유한 시설관리직을 채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인건비 증가 부담 등을 들어 전문성도 없는 회계담당 등 교육행정직 공무원들에게 안전 관리를 떠넘기는 모양새다.

◆"행정직에 시설관리 업무·교육 떠맡기는 현실…'취업사기' 당한 듯"

1일 대구 한 공립 학교 행정실 회계담당으로 근무하는 교육행정직 공무원 김모(34) 씨는 지난 5월 대구시교육청 측으로부터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교육센터 전문강사가 실시하는 '산업안전보건법 및 중대재해처벌법' 관련 내용 교육을 실시한다는 안내를 받았다고 밝혔다.

공문에 따르면 해당 교육을 받을 대상은 '공립·사립학교 및 기관의 시설관리직과 청소·환경미화 담당, 경비, 운전, 통학차량 안전요원, 영양(교)사, 조리사·조리실무원' 등이다.

그러나 학교 측은 향후 김 씨가 시설관리직을 교육하거나 그가 직접 관련 업무를 볼 수도 있다는 이유로 김 씨 또한 교육을 받기를 권했다. 김 씨는 "교육행정직인 내가 영상만 본다고 해서 업무를 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고 했다.

또 다른 공립 학교 행정실 직원 최모(36) 씨는 여기서 한술 더 떠 "하루만 해당 교육의 담당자로 나서 달라"는 학교 측 요청을 받았다. 교육 영상을 제공받았으니 이를 재생하고서 참석자들 집중만 유도하면 된다는 설명이었다.

최 씨는 "교직원들에게 영상만 재생해 주고 질의응답 등 시간은 생략했으나, 확실히 영상을 보는 분들 집중도가 떨어져 보였다"고 했다.

이런 상황이 빚어지는 것은 이 같은 학교에 전문성을 갖춘 시설관리 전담 공무원·공무직이 턱없이 부족한 때문으로 알려졌다.

관련법에 따라 각급 학교는 전력 소비량이 1천㎾ 이상인 경우 전기안전관리자를, 기숙사·보일러를 둔 경우 기계설비관리자를 두는 등 시설관리자를 지정해야 한다.

올해부터는 교내 안전사고가 발생할 경우 중대재해처벌법 상 '중대산업재해'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등에 해당해 학교장이 처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전국 시·도 교육청이 시설관리직 채용을 차일피일 미룬 지 길게는 수십년씩 되면서 교내 안전관리를 필요에 따라 외주화하거나, 아예 행정실 직원이나 교사 등에게 맡기기 일쑤다.

최근 JTBC 보도에 따르면 경기도에선 지난달 기준 전체 학교 가운데 40%에 해당하는 972곳에 시설관리관이 없었고, 경기도교육청은 10년 째 시설관리직을 뽑지 않았다.

대구 한 학교 공사현장 모습. 기사 내용과는 무관함. 매일신문 DB

◆대구시교육청, 2010년 이후 시설관리직 채용 X…"신속 외주체계로 보완 중"

대구시교육청 경우 지역 내 초중고 486개교 중 공립학교 392곳에서 근무하는 시설관리직은 공무원 163명, 공무직 277명 등 모두 440명으로 각 학교에 시설관리직이 최소 1명씩 근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는 과거 교내 전등 교환, 책걸상 수리 등 허드렛일을 맡기고자 채용한 조무직 공무원 등이 2013년 시설관리직으로 전환한 것으로, 지난 2010년을 끝으로 10년 이상 관련 시설관리직을 추가 채용하지 않았다고 시교육청 측은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업무 공백을 메우려 행정직 등 전문성 없는 직원에게 시설 관련 업무를 맡기다 보면 사고 발생 시 피해를 걷잡을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지난 2019년 경남 김해 한 초등학교에선 시설관리 업무를 대행하던 외주업체 직원 실수로 방화 셔터가 내려가 등교하던 초등학생이 크게 다쳤다.

한 교육행정직 공무원은 "교육청 공채 교육행정직에 응시해 취업했더니 본연 업무인 회계·행정은 뒷전이다. 공사와 시설관리, 가스·소방·승강기·놀이시설·석면 관리에다 산업안전·중대재해 담당까지 떠안게 생겼다. 취업사기를 당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관계자는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안전을 책임질 수 있는 전문성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그 학교에 보낼 수 있을까"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대구시교육청은 인건비와 공무원 정원 등 한계를 들어 대안 마련에 고심 중이라고 밝혔다.

시교육청 직속기관인 교육시설센터 직원들이 학교들 호출을 받아 출장 수리·관리를 하고, 각 학교 주변 시설유지보수업체 등과 계약해 신속하게 대응토록 한다는 것이다.

올해부터는 중대재해처벌법과 산업안전보건법 적용에 대응해 지역 내 컨설팅 기관 11곳과 계약, 매달 각 학교가 스스로 안전점검 및 교육을 벌이도록 했다고 시교육청은 밝혔다.

대구시교육청 관계자는 "학교와 교내 건물 신축 수요는 늘지만 정부의 공무원 정원 및 예산 증대에는 한계가 있다. 이에 상시 수요가 있는 건축·토목 담당 기술직은 매년 채용하지만 시설관리직은 꾸준히 채용하지 못했다"면서 "필요 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외주 체계를 확립하는 등 방법으로 현장 직원들 불편을 줄일 방침"이라고 말했다.

대구 한 학교 공사현장 모습. 기사 내용과는 무관함. 매일신문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