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지음/ 문학동네 펴냄
한국 문학계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소설가 김훈이 새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를 출간했다. 이 책은 2013년부터 9년간 문학동네 계간지에 발표한 6개 작품과 1개의 미발표작을 엮었다. 2006년 낸 첫 번째 소설집 '강산무진' 이후 16년 만에 나온 김훈의 소설집이다.
작가는 이 책의 표지에 "나는 한 사람의 이웃으로 이 글을 썼다"고 적었다. 이 작품은 평범한 인물들이 겪는 무참한 현실을 감정을 드러나지 않는 담담한 문체로 그려낸다. 운명과 대면하는 인간들의 힘겹고 누추한 삶을 쓰면서 이면에 작동하는 제도적 폭력을 고발하지만, 그저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멀찍이 떨어져 관찰하는 게 아닌, '이웃'의 거리 정도는 유지하고 있다는 방증일 테다.
책을 여는 단편 '명태와 고래'는 국가권력과 이데올로기에 깔린 채 이리저리 밀려나다, 제 땅에서 추방된 개인을 다루고 있다. 향일포 선착장에서 배와 배 사이의 물에 빠져 죽은 어부 이춘개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다.
금강산이 가까운 어래진 포구에서 터를 잡고 살던 이춘개 가족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 무리에 휩쓸려 가까운 남한의 향일포까지 밀려난다. 얼떨결에 월남을 한 셈이다.
'바다에 무슨 고향이며 타향이 있으랴' 싶었던 이춘개는 향일포에 눌러앉아 다시 삶을 이어 나간다. 어느날 명태잡이에 나선 이춘개의 배가 조류에 밀려 군사분계선 북쪽 어래진 포구로 넘어가게 된다.
이춘개는 군화 코가 빛나고 바지에 칼주름이 서 있는 젊은 북한군에게 취조를 당한다.
"넌 조국이 힘들 때 인민을 배반하고 적에게 넘어간 놈이다. 그렇지? 남쪽으로 탈출한 동기를 말하라./ 북쪽에서 밀려 내려오니까 남쪽으로…… 그냥 휩쓸려서……/ 이 새끼야. 니가 명태야?"
6개월간 억류 끝에 돌아왔지만, 곧장 경찰서로 끌려가 북쪽에서 했던 진술을 반복한다. 그리고 몇 년 뒤 이 진술들이 빌미가 돼 간첩으로 몰리고 13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다. 북한에선 인민의 배반자이고 남한에선 간첩으로 낙인찍힌 이춘개의 삶은 이념 앞에 말소된 개인을 나타낸다.
작가는 이 작품을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보고서를 읽은 뒤 '두려움과 절망감 속에서' 써 내려갔다. 그는 "짓밟힌 사람이 다시 삶을 추스려 나가는 모습은 겨우 조금밖에 쓰지 못했다"며 "고통과 절망을 말하기는 쉽고 희망을 설정하는 일은 늘 어렵다"고 고백한다.
표제작 '저만치 혼자서'는 죽음을 앞두고 호스피스 수녀원에 모여 살게 된 늙은 수녀들과 그들을 보살피는 젊은 신부의 나날을 그린다.
과거 기지촌과 나환자촌에서 봉사하던 수녀들은 시간 앞에서 무너진 육신과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도라지 수녀원'에 들어온다. 삶과 죽음의 문턱에 서있는 이들에게는 질병과 고통이 끊임없이 찾아온다.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뒤섞이거나 혀가 말려 들어가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약자들을 돌보며 무수히 많은 죽음을 지켜본 수녀들에게도 죽음은 두려운 것이었다.
늙은 수녀들을 임종까지 돌보는 장분도 신부는 이들 삶에 개입하려 들지 않는다. 무너진 정신을 지적하지 않고, 혀가 말려 내용조차 알 수 없는 고해성사를 듣는다. 다만 그들을 배웅해서 보낼 뿐이다.
"누구에게나 그에게 맞는 고유하고 개별적인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인간의 예절이며 하느님의 뜻일 겁니다. 죄를 짓는 것도 죄를 고백하는 것도 죄의 사함을 받는 것도 개별적인 것입니다."
이 단편은 2012년 작고한 천주교 사제 양종인 치릴로 신부의 생애를 모티브로 쓰였다. 양 신부는 생전에 상장례학교의 교장으로 임종을 앞둔 늙은 수녀들을 배웅하는 일을 했다.
저자는 '저만치 혼자서'를 쓸 땐 "편안했다"고 말한다. 이어 작가는 "죽음 저편의 신생에 대해서는 쓰지 못했고 죽음의 문턱 앞에 모여서 서로 기대면서 두려워하고 또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표정을 겨우 썼다. 모자라는 글이지만 나는 이 글을 쓸 때 편안했고, 가엾은 존재들 속에 살아 있는 생명의 힘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264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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