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아가다 수필가(2021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 수상자)
미국 어느 공동묘지에 묘비명으로 유명한 무덤이 있다. 이십대 초반의 젊은 부인이 그 주인공이다. 그 옆에는 전쟁 영웅으로 불리는 장군의 웅장한 묘가 있다. 화려한 전공이 새겨진 묘비에 비해 보잘것없이 초라한 무덤에 왜 사람들은 열광하면서 찾아올까. 그 비에 새겨진 다음과 같은 글귀 때문이다. "그녀는 어디를 가든지 항상 꽃을 지니고 다녔다."
부인의 남편이 묘비에 새겨 넣었다고 한다. 삶이 꽃처럼 아름다워 남편의 가슴에 꽃의 화신으로 남아있는 것일까. 어떤 마음으로 비문을 적었는지 알 수 없지만 기막힌 사랑의 고백임은 틀림없다. 남은 사람에게 한 송이 꽃으로 기억되는 삶이라면 비록 짧다하더라도 멋진 인생이 아니었을까 싶다. 간결하지만 강인한 비문에 숙연해지고,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어서 관광객이 줄지어 그 무덤을 찾는다고 한다.
묘비명에 관해서라면 아일랜드 극작가인 조지 버나드 쇼를 빠뜨릴 수 없다. 그의 비문은 산 자가 그를 애도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직접 쓴 것이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는 우물쭈물 살다간 사람이 아니었다. 실패를 딛고 일어나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와 함께 있으면 상대방도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마력이 있었다고 한다. 유머와 풍자로 세상을 살다 간 그는 비문을 통해서 현대인들에게 많은 화두를 던졌다. 떠난 후에도 사람들에게 능동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철학적 메시지를 남긴 것이다.
유명세와 권력을 누린 사람에 반하여 보통 사람은 별다른 비문이 없다. 자세히 보아야 겨우 알 수 있는 비석의 글자는 성씨와 본관, 태어난 날짜와 사망한 날짜, 자손 누구누구, 그리고 공동묘지의 번호가 적혀 있다. 때로는 비석이 아니라 묘지의 표지판이나 이정표 역할을 할 뿐이다. 빼곡히 들어선 무덤들 속에서 자손들은 비석에 적힌 몇 열, 몇 번을 보고 조상을 찾게 된다.
한세상 모양새 나게 살다간 사람이나 허투루 지내다 떠난 사람이나 한마디쯤 하고 싶은 말은 있을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며 억울한 인생 살았다고 변명할지라도 남이 나를 평가하기보다 내가 나를 돌아보는 것이 더 인간적이고 진정성 있지 않을까. 참새도 죽을 때 '짹' 소리하고 죽는다는데 하물며 인간인데 할 말 없으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요약해서 글 한 줄 남겨 둔다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꽃처럼 살다 간 여인은 꽃의 삶을 동경하게 했고, 버나드 쇼는 묘비의 글귀조차 명언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에게 경종을 울렸다. 그러면 이쯤에서 나는 어떤 비문을 남겨야 할까. 딱히 잘난 것도 없고 성공한 삶도 아니니 뭐라고 적어야 할까. 마지막 날이 임박하여 우물쭈물하지 말고 미리미리 생각해 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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