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의 시시각각] <88> 이념의 무덤, 경산 코발트 광산

입력 2022-03-08 06:00:00 수정 2022-03-10 13:48:02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우리 군과 경찰에 의해 민간인 수천 명이 학살된 경산 코발트 폐광산에 10년 만에 유해 발굴이 재개돼 다시 불을 밝혔다. 현장을 안내한 경산 코발트 광산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최승호 이사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우리 군과 경찰에 의해 민간인 수천 명이 학살된 경산 코발트 폐광산에 10년 만에 유해 발굴이 재개돼 다시 불을 밝혔다. 현장을 안내한 경산 코발트 광산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최승호 이사는 "유해 발굴 후 이곳에 기념관 건립, 역사평화공원 조성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경산 코발트 광산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최승호 이사가 10년 전 발굴이 중단된 수평 2굴에 쌓아둔 유해가 섞인 흙자루를 살펴보고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경산 코발트 광산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최승호 이사가 10년 전 발굴이 중단된 수평 2굴에 쌓아둔 유해가 섞인 흙자루를 살펴보고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경산 코발트 광산 수평 2굴 안쪽에 자리한 수직굴 입구. 물이 가득찬 이곳은 민간인이 학살돼 대량 매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정근식 진실화해위원장이 방문하며 헌화한 조화가 놓여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경산 코발트 광산 수평 2굴 안쪽에 자리한 수직굴 입구. 물이 가득찬 이곳은 민간인이 학살돼 대량 매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정근식 진실화해위원장이 방문하며 헌화한 조화가 놓여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경산 코발트 광산 수평 2굴 안쪽 미발굴 구간에 희생자 유해가 드러나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경산 코발트 광산 수평 2굴 안쪽 미발굴 구간에 희생자 유해가 드러나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경산 코발트 광산 수평 2굴 안쪽으로 끝없이 이어진 갱도. 일제때 코발트 등 광물을 캐기 위해 나무로 만든 사다리가 그대로 있다. 이곳에도 유해가 곳곳에서 목격됐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경산 코발트 광산 수평 2굴 안쪽으로 끝없이 이어진 갱도. 일제때 코발트 등 광물을 캐기 위해 나무로 만든 사다리가 그대로 있다. 이곳에도 유해가 곳곳에서 목격됐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경산 코발트 광산 수평 2굴 천장 암반에 용해된 광물질이 고드름 처럼 맺혀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경산 코발트 광산 수평 2굴 천장 암반에 용해된 광물질이 고드름 처럼 맺혀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경산 코발트 광산 민간인 학살현장에서 공사 관계자가 수평 2굴에 전등을 설치하고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경산 코발트 광산 민간인 학살현장에서 공사 관계자가 수평 2굴에 전등을 설치하고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경산 코발트 광산 민간인 학살 유족회 최승호 이사가 위령탑 앞에서 회상에 잠겨 있다. 경산신문 대표이자 기자인 최 이사는 29년째 이곳에 매달려 진실규명 작업을 해 오고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경산 코발트 광산 민간인 학살 유족회 최승호 이사가 위령탑 앞에서 회상에 잠겨 있다. 경산신문 대표이자 기자인 최 이사는 29년째 이곳에 매달려 진실규명 작업을 해 오고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경북 경산시 평산동 652-9, 코발트 광산터.

이념의 무덤, 암흑의 굴 속에 다시 불을 밝혔습니다.

전쟁 통에 민간인 수천 명이 억울하게 스러진 곳.

일제가 금·은·코발트를 수탈했던 이 폐 광산에서

72년 전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1948년 국방경비대 군인들의 반란과 이에 동조한

좌익 시민들이 봉기한 여·순 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이승만 정권은 좌익 분자들을 전향·계도 시킨다며

이듬해 6월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인원 할당. 충성경쟁이 시작됐습니다.

빨치산에 식량 제공자는 영순위. 이들의 강압에

마지못해 협력한 민간인도 '좌익'으로 찍혔습니다.

그래도 모자라자 쌀·밀가루·비료를 주겠다며

때로는 경찰이 협박하며 도장을 받았습니다.

연맹원 상당수는 땅만 파던 농민들이었습니다.

1950년 6월 전쟁이 터지자 사단이 났습니다.

졸지에 인민군과 한패, '빨갱이'로 몰렸습니다.

경산·청도·창녕·밀량, 멀리 영동에서도 보도연맹원이

끌려와 대구 형무소에, 유치장에, 창고에 갇혔습니다.

전세가 급변하자 형무소 소개 작전이 시작됐습니다.

군 트럭으로 끌려 온 연맹원·재소자들이 10명 씩

굴비처럼 묶여 저 수평굴 너머 수직굴 앞에 섰습니다.

한 명이 꼬꾸라지자 줄줄이 아래로 굴러떨어졌습니다.

재판도 없는 잔인한 총성이 종일 골짜기를 울렸습니다.

7월 20일부터 두 달간 100m 수직굴을 꽉 메웠습니다.

정부 산하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부터 3년간

처음으로 이곳에서 유해 520구를 발굴했습니다.

억울하게 희생된 지 57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정권의 부침속에 진실을 밝히던 불이 꺼진 지 10년.

마침내 출범한 2기 진실화해위가 다시 팔을 걷었습니다.

발굴 준비가 한창이지만 갈 길이 태산입니다.

10년 전 발굴하던 유해 섞인 흙자루는 아직 그대로,

끝 모를 굴 속엔 지금도 유해가 칠흙을 헤매고 있습니다.

당시 이곳 희생자는 최소 1천800명(진실화해위 주장).

유족회측은 족히 3천500명은 될거라고 말합니다.

학살자는 인민군이 아닌 우리 군과 경찰이었습니다.

114개 시‧군에서 최소10만, 최대 30만 명의 민간인이

'빨갱이'로 둔갑돼 국가 권력 총부리에 쓰러졌습니다.

전쟁보다 더 무서웠던 이념 갈라치기, 진영의 싸움질.

72년이나 흘렀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