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통 조국 지키겠다"는 우크라 예비신부…생이별한 韓예비신랑

입력 2022-03-01 15:38:42 수정 2022-03-01 16:5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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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한 기독교 시민단체 간사 이건희 씨…오는 5월 우크라이나인 여자친구와 결혼 약속
갑자기 터진 전쟁에 나라 지키겠다고 나선 여자친구…"마음이 무거워"

예비부부 이건희(36) 씨와 아나스타샤(27) 씨. 이들은 오는 5월 결혼식을 올린 뒤 대구에서 생활할 예정이었다. 본인 제공
예비부부 이건희(36) 씨와 아나스타샤(27) 씨. 이들은 오는 5월 결혼식을 올린 뒤 대구에서 생활할 예정이었다. 본인 제공

대구의 한 기독교 시민단체에서 간사로 근무하는 이건희(36) 씨는 매일 SNS를 통해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있는 여자친구 아나스타샤(27) 씨의 안부를 묻고 있다. 여자친구의 안전을 걱정한 이 씨는 전쟁 소식 대신 여느 연인처럼 안부를 물으며 생이별한 여자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러시아 지인 소개로 만나…오는 5월 결혼 약속

러시아 어학연수를 갔다 알게 된 러시아 친구의 소개로 지난해 만난 아나스타샤 씨와 이 씨는 오는 5월 결혼을 약속했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우크라이나를 오가며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즐겼을 때만 해도 이 씨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 사이에서는 평소 교류가 잦았던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 씨는 "여자친구의 사촌 동생도 러시아에 있다"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가족 국가나 마찬가지였다. 2월 설을 맞이해 우크라이나에 갔을 때만 하더라도 평화로운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전쟁 직후 우크라이나에 갈 수 없는 이 씨는 아나스타샤 씨와 연락이 닿지 않아 애간장이 탔다. 초기에는 아나스타샤 씨가 거주한 우크라이나 서부 리비우 지역에 포격이 많이 떨어지면서 전화선 연결이 자주 끊겼다.

이 씨는 "메신저를 보내도 답장이 빨리 오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매일 여자친구가 무사하도록 간절히 기도했다"고 말했다.

아나스타샤 씨가 전해준 우크라이나 서부 리비우 지역의 한 은행과 약국 모습. 시민들은 돈을 인출하고 상비약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본인 제공
아나스타샤 씨가 전해준 우크라이나 서부 리비우 지역의 한 은행과 약국 모습. 시민들은 돈을 인출하고 상비약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본인 제공

◆국가 총동원령에 온 가족이 남아…"한국이 적극 돕길"

아나스타샤 씨는 대부분 시간을 집에서 보내고 있다. 아나스타샤 씨의 가족은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피난길을 떠나려 했지만 국가 총동원령이 내려지면서 아나스타샤 아버지가 우크라이나에 남아야 할 상황이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겠다"고 다짐한 아나스타샤 씨와 가족은 우크라이나에 남아 국가를 지키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대다수 지역은 저녁 통금이 있는 까닭에 아나스타샤 씨는 낮에만 잠시 바깥 상황을 살피기 위해 외출을 하거나 식량을 구비하기 위해 마트를 다녀온다고 했다. 마트에서도 식품이 대부분 동이 났고 가격도 오른 상태다.

매일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상태다. 공습경보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곧장 지하실이나 인근 방공호로 대피해야 한다. 대부분 지하철역이 방공호 역할을 하지만 서부 리비우 지역엔 지하철이 없어 아나스타샤 씨와 가족은 집 지하실로 몸을 숨긴다고 전했다.

아나스타샤 씨는 앞으로 나라를 위해 자원봉사에 나설 예정이다. 군대 경험이 없는 이들은 참전 대신 지역 거리를 순찰하거나 러시아의 '사보타주'(의도적 파괴행위) 행위를 감시하는 자원봉사에 참여할 수 있다.

이 씨는 "여자친구가 매일 공습경보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에 편히 잠을 못 잤는데 어제는 (2월 28일) 사이렌이 울리지 않아 잠을 편하게 잤다고 했다"며 "밖이 위험하기에 집에서 몸을 피하면 좋겠지만 나라를 위해 나서겠다는 본인의 생각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몸조심하라고는 했지만 솔직히 마음은 무겁다"고 말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뒤 하루빨리 결혼식을 올려 대구에서 함께 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우크라이나와 대구에서 각각 결혼식을 올린 뒤 대구에서 신혼집을 차릴 예정이다.

이건희 씨는 "중국이 러시아를 돕는다는 말이 돌면서 우크라이나에서 반중 정서가 심해지고 있다. 유럽 등 전 세계가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만큼 한국이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도왔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아나스타샤 씨 역시 "전쟁이 빨리 끝나면 좋겠지만 굴욕적인 항복이나 모든 걸 포기하는 일은 원하지 않는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아나스타샤 씨가 전해준 우크라이나의 한 마트 모습. 대부분 음식이 동 난 상태다. 본인 제공
아나스타샤 씨가 전해준 우크라이나의 한 마트 모습. 대부분 음식이 동 난 상태다. 본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