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멋대로 그림읽기] 외로워서 든 붓, 마음을 열다…최복호 작 '기억과 망각의 시간'

입력 2022-01-04 10:57:05 수정 2022-01-04 17:29:10

Mixed media on Polypropylene firm, 142.5x114.5cm, ,2021년

'늙는다는 것'과 '나이 든다는 것'은 물리적 시간의 측면에서는 같은 의미이지만, '삶의 양태'의 측면에서 보면 확연히 달라진다. 전자는 쓸데없는 자기고집과 과거에 사로잡힌 삶이라면, 후자는 익은 술과 오래된 친구처럼 세상을 관조하며 타인의 잘못이나 실수에 보다 너그럽게 대처할 줄 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인생은 열에 아홉이 후자보다 전자의 영역에 머무는 일이 많은 가운데 드물게, 아주 드물게 후자의 인격을 지닌 사람을 만나면 정말 날 듯이 즐겁다.

최복호가 그렇다. 그는 20대부터 반세기 가깝게 패션디자이너로 살아왔다. 그런 그가 최근 고희를 넘긴 화가로서 왕성하게 그림에 몰두하고 있다. 물론 디자이너도 옷을 만들기 위해 드로잉은 필수적이지만, 그것을 온전히 회화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기자가 아는 한 최복호가 본격적으로 회화를 위해 붓을 든 시점은 코로나19로 우리의 일상이 요동치던 2020년 봄부터다. 그는 코로나19로 인해 갑작스런 삶의 전환점을 맞아 스스로의 삶에 대한 반성과 현재성의 극복을 위해 젊은 시절부터 꿈이었던 캔버스와 만났고 그 결과물들을 모아 2021년 4월 대백프라자갤러리에서 화가로서 첫 개인전도 열었다.

최복호 작 '기억과 망각의 시간'은 화면 상단이 점무늬가 있는 보랏빛으로 장식됐고 아래엔 와인 잔을 연상하게 하는 세 명의 여인 얼굴이 나란히, 단순하게 그려져 있다. 그녀들은 각각 머리카락을 얼굴 반쪽을 가려 길게 늘어뜨려져 있다.

그런데 작품 제목이 왜 하필 '기억과 망각의 시간'일까. 보통 우리의 뇌는 나쁜 건 잘 '기억'하고, 좋은 추억은 잘 '망각'해 버리는 속성이 있다. 작가의 그림에서 기억되는 건 무엇이고,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은 무엇일까.

최복호의 말을 따라가 보면, 그의 내면의 언어가 그림이 되고 인물이 되었다고 한다. 자신을 달래기 위해 그린 그림은 그 동기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웠지만 좌절감을 느끼며 우울한 기분으로 보낸 후 다시 시작한 게 인물표현이다. 그것은 본능적이었고 자유로이 떠도는 그의 숨겨진 스토리이자 의식의 흐름이었다.

그는 역동적인 획을 사용해 작업했지만 미학적인 구성은 포기했다. 그렇지만 그림을 그리면서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풍요를 느꼈다고 했다. 패션은 예술이면서 상업적 비즈니스이므로 스트레스가 있지만, 그림은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내면은 행복을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었던 것이다.

인물을 그린다는 건 속에 숨겨진 스토리가 많다는 말이다. 가슴에 담아두면 어안이 멍멍해져 술을 마시지만 이것을 말로 토해내면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 패션에서의 색은 소비자를 위한 색상이었지만 캔버스에서 드러난 색은 온전히 최복호만의 개인적인 색상이 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작가에게 유일하게 보라색 배경이 있는 그림이다.

"이 작품을 할 때 무척 외로웠다. 주위에 사람이 많아도…. 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사람들, 어깨가 무겁게 느껴졌다. 같은 인물 3명의 여인이 긴 머리로 한쪽 눈을 가리고 직시하는 모습은 항상 나를 내면에 담아두고 보이지 않는 경계, 늘 내면에 무엇인가 표출되지 않은 것이 담겨져 있다."

작가의 이 고백은 어쩌면 나이듦의 외로움을 회화로 극복하려는 초인적 의지의 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