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락 전 한국국제문화교류연구원(KOFICE) 원장·시인
'톨스토이냐 도스토옙스키냐'라는 책으로 유명한 비평가 조지 슈타이너(G. Steiner·1929~2020)는 서구문학사 3대 승리의 시대로 아테네의 극작가와 플라톤 시대, 셰익스피어 시대, 그리고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배출한 19세기 러시아 소설의 시대를 지적한 바 있다.
실제로 아테네 시대의 많은 걸작과 플라톤의 풍요로운 철학적 언어, 인류의 고전이 된 셰익스피어, 사회를 총체적으로 조망한 톨스토이나 인간의 우울이나 절망의 심연을 돋보기로 깊이 들여다본 도스토옙스키 모두 서구 문학뿐 아니라 인류 정신사의 큰 승리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슈타이너의 이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문학이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문학적 평가 역시 주관적이고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
올해 대구문화재단이 시행한 여러 사업 가운데 '2021 문화예술인 현창사업'이라는 프로젝트가 있다. 그간 유실됐거나 저평가된 지역의 예술가를 발굴하고 재평가하는 프로그램이다. 매우 의미있는 사업이다.
평소 시인 백기만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던 박상봉 시인과 백기만을 아끼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나는 이 사업에 참여했다. 우리가 수행한 현창사업으로 ▷백기만 시인의 시 낭송회 ▷백기만 시인에 대한 학술세미나 ▷백기만 묘소 탐방 ▷조사연구 및 책자 발간 등이다. 특히 대구에 있는 국립신암선열공원 안에 있는 백기만 시인 묘소를 탐방할 때는 시인의 유일한 생존 혈육인 둘째 따님 백용희 여사가 동행하여 행사의 의미를 더 빛내주었다.
백기만(1902~1969)은 근대 시문학 초기 대구가 낳은 시인이다. 그는 단순히 시를 창작하는 시인을 뛰어넘어 독립운동가, 교육자, 문화운동가, 정치인 등으로 이어지는 폭넓은 삶을 산 '문화민주주의자'이다.
그는 근대화 초기에 '개벽'(開闢·1923. 3)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하고 동인지 '금성'(金星·1923. 11)을 창간해 대구의 고월 이장희 같은 시인을 발굴해 한국문학사를 풍요롭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동시대 함께 활동했던 문화예술가들의 삶을 조명하고 기리는 '상화와 고월'(1951. 5)와 '씨 뿌린 사람들'(1959. 2)을 펴내 한국문학과 지역 문화예술계에 씨를 뿌렸으며, '경북문학협회'(1957. 7)와 '경북문화단체총연합회'(1959. 5)라는 문학단체를 결성해 지역문학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대구경북 출신 문인을 들라면 대부분은 시인 이상화, 이육사, 이장희와 소설가 현진건을 먼저 생각한다. 백기만 시인이 저평가받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그의 정치활동, 특히 세칭 '혁신계'로 불린 진보적 정치활동 때문일 것이다.
백기만은 ▷반민특위 조사위원 ▷남로당계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참가 ▷여운형계인 근로인민당 경북지부위원장 ▷사회대중당 등 주로 진보적인 정치활동을 해왔고, 참의원 선거에 출마해 낙선하기도 했다. 시대의 흐름보다 한 걸음 앞선 정치활동을 한 게 그의 평가에 치명적인 독(毒)으로 작용했다.
식민지 시대와 해방 공간과 비교할 때 시대와 정치 환경이 크게 바뀐 21세기이다. 우리도 이제 선진국이 됐다. 밥만 아니라 정신적인 성장이야말로 진짜 선진국의 지표이다. 이제는 정치·사상적이거나 또 다른 이유로 그간 압제되고 저평가된 문인·예술가뿐 아니라 다양한 정치, 학문 분야의 인물들을 발굴하고 재평가할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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