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서원철폐와 이권 카르텔의 혁파

입력 2021-11-26 18:24:52 수정 2021-11-26 19:17:48

김문환 역사저널리스트

우리 역사 최초의 서원인 영주 소수서원.
우리 역사 최초의 서원인 영주 소수서원.
김문환 역사저널리스트
김문환 역사저널리스트

전통의 멋을 간직한 한옥으로 국내외 관광객의 사랑을 받는 북촌 남쪽 운현궁으로 가보자.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살던 운현궁에서 조선 후기 왕실 역사를 돌아본다. 사실 고종은 왕위에 오를 위치는 아니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 꿇은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8대손이 흥선대원군이다. 왕실에서 이미 200여 년 전 떨어져 나온 형국이다.

그러나, 영조가 친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서 굶겨 죽인 벌인가. 왕실 손이 귀해지더니, 사도세자의 고손자 헌종 때 대가 끊겼다. 왕위는 사도세자가 숙빈 임씨에게서 얻은 은언군(정조의 이복동생)의 손자 강화도령 원범(철종)으로 넘어갔다. 철종이 재위 14년 만인 1863년 아들 없이 승하하자, 왕실 최고 어른 조대비(정조의 손자며느리)는 흥선대원군의 아들 이명복을 고종으로 앉혔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이 은언군의 동복동생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돼 촌수가 가까워진 덕분이었다. 호적상 고종은 철종의 7촌 조카(인평대군부터는 17촌)이다.

운현궁에 있는 흥선대원군 초상화.
운현궁에 있는 흥선대원군 초상화.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아들 3명 가운데 셋째, 막내라는 점이다. 큰아들 이재선은 흥선대원군의 서자이니 그렇다고 쳐도, 고종과 동복으로 일곱 살 많은 열아홉 살 이재면이 있었다. 그런데, 열두 살 이명복을 왕위로 올린 이유는 자명하다. 열다섯 살보다 어린 왕이어야 대비의 수렴청정이 가능하고, 그 수렴청정의 대권을 흥선대원군이 넘겨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이 이렇게 무섭다. 부자지간도 없다. 흥선대원군이 1873년 며느리 명성황후에게 밀려 실각할 때까지 10년간 펼친 정책 가운데 서원 철폐가 돋보인다.

발길을 경상북도 영주시로 돌려보자. 풍기군수 주세붕이 1543년 중종 38년 백운동에 설립한 조선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소나무 숲 사이로 고풍스러운 향내를 전한다. 서원은 유학의 창시자 공자를 비롯한 대유학자들을 성인으로 기리는 사당이자 교육기관이었다. 동시에 조선을 떠받치는 유생들의 구심체로 여론을 형성하는 긍정적인 기능이 컸다.

하지만, 방대한 소속 토지는 면세여서 국가 재정을 좀먹었다. 부족한 세수를 메우기 위해 백성의 손바닥만 한 토지에 온갖 세금을 물리는 약탈적 지배체제가 공고화됐다. 1741년 영조 17년 이후 신규 서원 건립은 거의 중단됐지만, 기존 서원의 폐단은 더 커졌다. 1863년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기득권층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1864년부터 서원 개혁에 돌입했다. 1865년 조선을 장악했던 당파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뜻을 기리는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철폐한 것은 적폐 청산의 상징이었다. 1870년까지 전국 650개 서원 가운데 7% 47개만 남기고 문을 닫는 대개혁을 단행했다.

운현궁 노안당.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를 비롯한 각정 대혁책을 논의하던 사랑채.
운현궁 노안당.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를 비롯한 각정 대혁책을 논의하던 사랑채.

다윈의 '종의 기원'의 무대 갈라파고스 제도. 이곳의 거대한 바다거북이 100살을 훌쩍 넘겨 건강하게 사는 비결이 최근 밝혀졌다. 종양 억제 유전자를 지속적으로 복제해 노화와 암을 막는 것이다. 민주사회의 종양 억제 유전자 복제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정치권력을 지속적으로 탄생시키는 일이다. 이를 통해 부당한 방법으로 카르텔을 형성해 국민을 약탈하는 기득권, 즉 민주사회 암덩어리를 척결해야 한다.

조선시대 서원 경제를 장악한 채 국민의 등골을 빼던 기득권층이 있었다면, 현대에는 소위 민주화운동, 시민운동 세력을 빙자하며 국회, 중앙정부, 지방정부에 똬리를 틀고 각종 입법권, 인허가권, 행정 권력을 동원해 이권과 폭리를 취하는 기득권 세력이 있다. 이들은 혈세를 제 주머닛돈처럼 쓰기도 한다. 서원 철폐에 버금가는 이권 카르텔의 혁파를 통해 공정과 정의를 회복하는 대한민국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