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이방인과의 조우

입력 2021-11-25 10:38:14

이수민 소설가

이수민 소설가
이수민 소설가

지난봄 공원에서 혼자 농구공 튕기는 외국인 여성을 보았다. 다가가 말을 건넸다.

"같이 해도 될까요? 저도 좀 배웠는데."

농구하는 여성의 존재가 반가웠다. '숨은 고수'앱으로 만난 코치에게 농구를 배우던 나는 여성 동지들을 찾지 못해 운동을 그만뒀다.

말보다 공이 먼저 날아왔다. 침묵 속에서 몇 번 공이 오가는가 싶더니 말이 한두 마디씩 얹혔다. 그녀는 7년 동안 영어를 가르쳤으며, 대학원 진학을 위해 곧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녀는 언어학도였다. 골대를 따라 물음표를 그리듯 질문을 던지니 조리 있는 답이 골대 밑으로 툭툭 떨어졌다. 상쾌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남미 소수부족의 잊힌 언어를 '발굴'한 경험이 있는 전문가였다.

사라진 언어를 발굴하는 프로젝트가 있다니,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를 채근해 다시 만났다. '녹음이라도 해둘걸'하는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좌뇌와 우뇌를 두루 자극하는 대화를 나눴다. 덕분에 좋은 도예 배움터를 알게 되었고, 키우던 화분도 선물받았다.

처음부터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 쉽게 말 붙이는 성격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는 엄마 치마 뒤에 숨어 사람을 만났다. 다양한 사회의 테두리를 넘으면서 의식적으로 소통 방식을 바꿨다. 대학원 시절 전공 수업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었기 때문에 먼저 다가가야 노트 필기라도 빌릴 수 있었고, 개발도상국에서 구호 업무를 할 때도 경계를 허물고 신뢰부터 쌓아야 오지마을 주민의 솔직한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주말 아침 아파트 근처 언덕을 오르는데 "날이 썬득허다"라며 누가 말을 건넸다. 고개를 돌리니 자그마한 몸집의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함께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김장했어?" 마치 알고 지내는 사이처럼 그녀가 물었다. 웃음을 섞어 엄마의 김장 실패담을 말했더니 생기 넘치는 사투리가 쏟아졌다. "다라이에 소금을 치치 뿌리가 담박담박하게 담그면 되는데, 와." 흐뭇하게 말을 곱씹었다. '언젠가 글에도 말투를 옮겨 봐야지' 생각하면서.

사실 도시에서 이런 만남이 흔하진 않다. 먼저 벽을 허물고 말을 건넸다간 외판원이나 사이비 종교인으로 오해받기 일쑤니까. 사람들의 무표정에서 가끔 한기가 몰아친다.

노천탕에 앉아 이야기듣는 걸 즐긴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어서인지 무장해제된 말이 스스럼없이 오간다. 작가가 억지로 만들 수 없는 말, 살아 있는 말이다. 어설픈 사투리로 몇 마디 보태 보는데, 그들의 리듬감을 따라잡기에 역부족이다.

지금도 공원에 갈 때면 농구 골대를 한 번씩 바라본다. 사라진 언어에 대한 호기심은 여전히 코트 안에 머물러 있다. 어쩌면 그 주제에 관해 짧은 소설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방인과의 조우가 내 안에 남긴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