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연구자
강세황의 가장 유명한 그림은 '자화상'일 것이다. 붓을 잡고 자기 모습을 그렸고, 자신을 설명하는 글을 지어 스스로 써 넣었다. 누구의 머리와 손도 빌리지 않고 시서화 삼절의 재능을 발휘해 자신의 초상화를 후세에 남겼다.
칠십의 나이에 붓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이렇게 잘 그린 묘사력의 그림 실력이 우선 감탄스럽고, 오사모에 도포라는 기상천외한 차림새로 그렸다는 발상이 더욱 놀랍다. 머리에 오사모를 썼으면 옷은 관복이어야 하고, 도포를 입었으면 갓을 써야 하므로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차림새다. 모자와 옷이 모순되는 이유는 찬문에 밝혀놓았다.
피하인사(彼何人斯)/ 수미호백(鬚眉晧白)/ 정오모(頂烏帽) 피야복(披野服)/ 어이견((於以見) 심산림이명조적(心山林而名朝籍)/ 흉장이유(胸藏二酉) 필요오악(筆搖五嶽)/ 인나득지(人那得知)/ 아자위락(我自爲樂)/ 옹년칠십(翁年七十) 옹호노죽(翁號露竹)/ 기진자사(其眞自寫) 기찬자작(其贊自作)/ 세재(歲在) 현익섭제격(玄黓攝提格)/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수염과 눈썹이 하얗다/ 머리에 오사모를 쓰고 몸에는 도포를 입었다/ 이를 보니 마음은 산림에 이름은 조정에 있음을 알겠다/ 가슴에는 이유(二酉)를 간직했고 붓은 오악(五嶽)을 흔든다/ 세상 사람이야 어찌 알겠나/ 나 스스로 낙으로 삼는다/ 옹의 나이는 칠십이요 옹의 호는 노죽(露竹)이다/ 이 초상을 스스로 그렸고 이 찬문을 스스로 지었다/ 해는 현익섭제격(임인, 1782년)이다/
내가 살고 싶은 삶과 부조(父祖)와 자손(子孫)의 사이에 있는 가문의 일원으로서 내가 가야할 길이 일치하지 않음을 의관(衣冠)의 부조화로 시각화했다. 누구라도 다르지 않겠지만 내 뜻대로 살고 싶다는 이상과 입신출세를 요구받는 현실이라는 두 명제는 불화하기 마련이다. 강세황은 오랫동안 재야에 있다가 환갑이 넘어 벼슬을 살았기 때문에 그 괴리를 더욱 선명하게 느꼈을 것이다.
강세황은 산림과 조정을 모두 체험했고, 장수의 복을 누렸다. 고희의 나이에 이르러 모든 체면치레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인생을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었기에 이런 파격의 자화상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런 행운을 감안하더라도 한 개인의 사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의 불일치를 착잡하게 그려낸 이 모순의 '자화상'이 주는 고뇌의 울림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런 자신을 이런 모습으로 자손에게 남긴 한 지식인의 당당함과 솔직한 용기는 더욱 그렇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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