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 대선과 대구 서문시장

입력 2021-11-04 16:47:43 수정 2021-11-04 19:19:58

대구 서문시장. 자료사진. 우태욱 기자 woo@imaeil.com
대구 서문시장. 자료사진. 우태욱 기자 woo@imaeil.com
황희진 디지털국 기자
황희진 디지털국 기자

박정희 대통령이 3선에 도전한 7대 대선을 20일 앞둔 1971년 4월 17일. 대구 서문시장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토요일이었던 이날 박정희 민주공화당 후보가 대구에서 선거 유세를 펼쳤는데, 서문시장 번영회가 돌연 시장 셔터를 내리고 전기를 차단해 1천여 명의 상인이 반발한 것.

당시 박정희 후보 유세장 인근에서는 청중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모습이 포착되는 등 청중 동원 논란이 불거졌다. 그래서 서문시장 문이 닫힌 것을 두고 시장에 갈 사람들을 유세장으로 몰기 위한 시도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런 노력이 전국 곳곳에서 이어졌지만, 박정희 후보는 김대중 신민당 후보와 접전 끝에 90만 표 차로 겨우 당선됐다.

13대 대선을 한 달여 앞둔 1987년 10월 24일.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는 대구 반월당에서 산격동 체육관까지 무개차(오픈카)로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체육관에서 대선 유세를 한 노태우 후보는 곧이어 서문시장으로 향했다. 이날 서문시장 방문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원래는 체육관에서 신암동 대구공고까지 다시 카퍼레이드를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노태우 후보 지시로 서문시장을 찾는 것으로 일정이 급히 변경됐다. 그날 대구공고로 가는 길목에 있는 경북대에서 청년들이 대규모 반대 시위를 하고 있어 피한 맥락이 짙다. 실제로 이날 체육관 인근에서 청년들이 던진 화염병이 노태우 후보가 탄 차 바로 옆에 떨어지기도 했다.

유세장 흥행을 위해 문이 닫히고 원래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택하는 '플랜 B' 취급을 받기도 했던 서문시장은, 이제는 대선 후보들이 앞다퉈 찾는 '핫 플레이스'가 됐다. 대구가 대한민국 보수 정치의 중심지로 여겨지는 까닭에 보수 후보들을 주로 반긴 것으로 인식돼 있지만, 반대 사례도 있다.

14대 대선을 5개월 앞둔 1992년 7월 16일. 김대중 민주당 후보는 대선 후보로서 대구를 첫 공식 방문해 서문시장을 찾았다. 그런데 상인들이 김대중 후보에게 "미남"이라거나 "막걸리 마시고 가시라"는 등, 당시 팽배해 있던 영호남 지역감정에도 예상 밖으로 환대해 민주당 관계자들이 꽤 고무됐다는 소식이 언론 보도로 전해졌다.

왜였을까. 2년여 전인 1990년 1월 22일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이 뭉쳐 민주자유당을 출범한 '3당 합당'을 두고 '야합'이라며 김대중 후보의 대권 라이벌인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에게 책임을 묻는 여론이 TK(대구경북)에도 일부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서문시장은 보수 후보라도 사안을 따져 반기거나 분노했다. 두 아들의 병역 기피 의혹 때문에 지지율이 10%대로 추락한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는 15대 대선을 한 달여 앞둔 1997년 11월 5일 서문시장을 찾아 '3김 정치 청산'을 내걸고 '반김영삼 비김대중' 분위기를 띄웠다. 이후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30%대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17대 대선을 한 달여 앞둔 2007년 11월 13일 서문시장을 찾은 이회창 후보는 한 시민으로부터 '계란 테러'를 당했다. 이 시민은 이회창 후보가 경선을 거치지 않고 무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한 게 실망스러워 계란을 던졌다고 했다.

오늘(5일) 마침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서문시장을 찾을 예정이다. 또한, 같은 날 확정되는 국민의힘 대선 후보도 앞으로 대구를 찾는다면 빼놓지 않고 서문시장을 방문할 것이다. 후보자와 유권자 가리지 않고 어떤 말·표정·행동이 만들어져 어우러지고 반향도 일으키면서 우리 정치사에 기록될지 기대된다.